[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인공지능(AI) 산업 급성장으로 글로벌 전력 수요가 폭증하면서 신재생 에너지 시장의 질서 자체가 바뀌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탄소중립’이 에너지 정책의 최우선 가치였다면 이제는 어떻게든 전기를 확보하는 것이 산업과 국가의 최대 과제로 떠오르는 분위기다.
특히 이번 주 들어 미국과 유럽에서 잇따라 등장한 전력난 관련 사례들은 AI 시대가 기존 재생에너지 전략을 흔들기 시작했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확대만으로는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워지면서 배터리 저장장치(이하 ESS)와 천연가스, 원자력까지 결합하는 새로운 전력 체계가 현실화하는 모습이다.
◆ AI 데이터센터가 촉발한 전력 수요 처리가 관건
이번 흐름의 직접적 계기는 AI 데이터센터 확산이다. 지난 6일(현지시간) 글로벌 통신사 로이터는 마이크로소프트가 AI 사업 확대에 따른 전력 사용 급증으로 인해 기존 청정에너지 목표 조정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생성형 AI 서비스와 클라우드 인프라 확대 과정에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전력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같은 날 미국 텍사스에서는 데이터센터 기업들이 송전망 연결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체 발전소 구축에 나서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전력망 접속 대기 기간이 길어지자 아예 독립형 발전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덴마크는 최근 신규 데이터센터의 전력망 연결 신청이 폭증하자 일부 지역에서 신규 연결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AI 인프라 경쟁이 국가 전력망 수용 능력을 넘어서는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올해 들어 “향후 전 세계 전력 수요 증가의 상당 부분이 AI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AI 연산용 반도체와 서버는 일반 인터넷 서비스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소비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생성형 AI 시장 확대가 본격화되는 2027~2030년 사이 글로벌 전력 인프라 부족 현상이 더욱 심화할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주목되는 부분은 이 같은 전력난이 오히려 기존 재생에너지 전략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태양광과 풍력은 발전량이 기후와 시간대에 따라 크게 변동한다. 반면 AI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전력을 요구한다. 결국 친환경 전력 확대만으로는 AI 시대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현실이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과 빅테크 기업들은 최근 들어 재생에너지와 함께 ESS, 천연가스, 원전 등을 혼합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큰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ESS다. 낮 동안 생산한 태양광 전력을 저장했다가 야간에 공급하는 방식이 사실상 AI 시대 전력 시스템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올해 미국 신규 발전 설비의 절반 이상이 태양광이며, 배터리 저장장치 비중도 급증하고 있다. 신규 전력 시스템이 사실상 ‘태양광+ESS’ 조합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의미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재생에너지 2.0 시대”라는 평가도 나온다. 단순히 태양광 패널이나 풍력 터빈을 늘리는 단계가 아니라 저장·송배전·전력 안정화까지 포함하는 통합 전력 시스템 경쟁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 환경보단 경제성 확보가 우선.. 시장 논리도 변화
재생에너지 시장의 또 다른 변화는 경제성이다. 국제재생에너지기구(IRENA)가 공개한 보고서에 따르면 태양광과 배터리 저장장치를 결합한 발전 비용이 신규 화석연료 발전보다 경쟁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에는 재생에너지가 환경 보호를 위한 ‘비용 부담’ 성격이 강했다면 이제는 오히려 경제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의미다.
특히 태양광 패널 가격 하락과 배터리 기술 발전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글로벌 투자 자금도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ESS 투자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으며, 중동 산유국들 역시 대규모 태양광·수소 프로젝트를 확대하는 분위기다.
업계에서는 앞으로 신재생 에너지 산업의 핵심이 단순 발전설비가 아니라 ▲배터리 ▲전력망 ▲변압기 ▲전력관리 소프트웨어 등으로 이동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국내 산업계 역시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 통신사 등을 중심으로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전력 확보 문제가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상황 하에선 필연적인 수순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도권 전력망 부담이 커지면서 지방 분산형 전력 시스템과 ESS 확대 필요성도 함께 거론된다.
산업계에서는 배터리 기업뿐 아니라 변압기·전력기기 업체들의 수혜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실제 최근 글로벌 전력기기 시장에서는 초고압 변압기 공급 부족 현상이 이어지고 있으며, 한국 기업들의 수출도 증가하는 흐름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신재생 에너지 시장이 단순 친환경 산업이 아니라 “AI 시대 핵심 인프라 산업”으로 재정의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한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탄소 감축이 재생에너지 확대의 핵심 명분이었다면, 지금은 전력 확보와 산업 경쟁력이 더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며 “AI 시대에는 전기를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지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