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정부의 에너지 전환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국내 전력산업의 디지털 전환이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탄소중립 이행 과정에서 전력 생산·운영 체계의 복잡성이 커지자, 노후 발전설비를 인공지능(AI)과 자동화 기술 중심으로 고도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산업계 전반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다.
◆ 국내외 전문가 80여명, ABB 포럼서 발전설비 현대화 방향 논의
기존 전력 시스템은 석탄·가스·원자력 등 대규모 중앙집중형 발전소를 중심으로 안정적 전력을 생산·공급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태양광과 풍력 중심의 재생에너지가 빠르게 늘어나면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재생에너지는 기상 조건에 따라 발전량이 급변하는 특성이 있어 전력 공급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실시간 데이터 분석과 예측, 자동 제어 역량이 필수로 꼽힌다.
정부 역시 이러한 변화에 맞춰 전력 체계 전환을 추진 중이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2024~2038년)은 2038년까지 국내 재생에너지 설비용량을 121.9GW 수준으로 확대하고, 전체 발전량에서 비탄소 전원이 차지하는 비중을 70.7%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태양광·풍력·수소 등 청정에너지 비중이 커지는 만큼 전력망 운영 방식 자체의 혁신이 불가피해졌다는 평가다.
문제는 국내 발전설비 상당수가 노후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점이다. 산업계에서는 설비 교체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단순 장비 교체를 넘어 ‘디지털 기반 운영 체계’로의 전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본다. 발전설비를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운영 데이터를 실시간 분석하고, AI를 통해 이상 징후를 사전에 예측하는 ‘예지 정비(Predictive Maintenance)’ 기술이 대표적이다.
실제 발전·에너지 업계에서는 설비 효율 향상뿐 아니라 운영 인력 부족, 안전성 강화, 유지보수 비용 절감 등을 이유로 디지털화 투자가 늘고 있다. 전력산업 특성상 예기치 못한 설비 고장은 전력 수급 안정성과 직결되는 만큼, 설비 이상을 사전에 감지하는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같은 흐름은 최근 산업계 행사에서도 핵심 의제로 부상했다. 글로벌 전기화·자동화 기업 ABB는 지난 6일 서울에서 ‘ABB Future of Power Forum’을 열고 국내외 에너지 산업 전문가 80여 명과 함께 한국 전력산업의 디지털 전환 방향을 논의했다고 13일 밝혔다.
이번 포럼에서는 분산화(Decentralization), 탈탄소화(Decarbonization), 디지털화(Digitalization) 등 이른바 ‘3D 전환’이 한국 발전 산업의 지형을 어떻게 재편하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졌다. 발전설비 노후화, 변화하는 에너지 믹스, 운영 유연성 및 신뢰성 확보 수요 증가 등이 산업 전반의 구조 변화를 촉진하는 핵심 요인으로 제시됐다.
특히 업계가 주목하는 지점은 ‘운영 중단 없는 디지털 전환’이다. 발전소와 에너지 플랜트는 특성상 시스템 개편을 위해 장기간 가동을 멈추기 어렵기 때문에,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단계적으로 AI·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는 방식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ABB는 이번 행사에서 ‘오토메이션 익스텐디드(Automation Extended)’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기존 분산제어시스템(DCS)을 운영 중단 없이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설계된 기술로, 핵심 공정 제어를 담당하는 운영 환경과 실시간 분석·엣지 인텔리전스·AI 기반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디지털 환경을 분리해 안정성과 혁신을 동시에 확보하는 구조가 특징이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방식이 발전설비 현대화 과정의 현실적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발전소의 경우 신규 설비 교체 비용이 크고 가동 중단에 따른 손실 부담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 설비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데이터 분석과 AI 기술을 점진적으로 적용하는 전략이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에너지 공기업과 민간기업 간 협업도 확대되는 추세다. 한국전력 계열 ICT 전문기관인 한전KDN은 지난해 ABB와 에너지 산업 디지털 전환 및 탄소중립 가속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전력 자동화와 에너지 ICT 분야 협력을 추진 중이다. 한국지역난방공사 역시 집단에너지설비 인공지능 전환을 위한 기술 교류를 이어가며 AI 기반 플랜트 구축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
국내 에너지 업계의 디지털화 움직임은 이미 가시화되고 있다는 평가다. ABB가 발표한 ‘2025 아시아태평양 에너지 전환 준비지수(Asia Pacific Energy Transition Readiness Index)’에 따르면 한국의 디지털화 투자 우선순위 비중은 43%로 아시아 평균(38%)을 상회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재생에너지 확대와 에너지 안보 강화 필요성이 동시에 커지는 가운데 디지털 전환을 핵심 전략으로 인식하는 기업이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전력산업 경쟁력이 ‘얼마나 많은 전기를 생산하느냐’보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운영하느냐’에 달릴 가능성이 커졌다고 본다. 재생에너지 확대가 불가피한 흐름이 된 만큼 발전·송배전 설비 전반의 지능화와 자동화 수준이 전력 안정성과 비용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요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앤더슨 마테센 ABB 에너지산업 사업부 아시아 총괄대표는 포럼에서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 목표는 도전적이지만 한국 에너지 업계는 이미 실행 단계에 진입했다”며 “재생에너지 확대와 디지털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자동화 기술이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