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재영 기자] 국내 자동차 산업이 전기차·자율주행 중심의 미래차 시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지만 정작 산업 생태계의 핵심 축인 자동차 부품업계의 전환 속도는 더딘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대규모 금융지원과 민관 협의체 출범을 통해 미래차 전환 지원에 본격 착수했지만 현장에서는 자금과 기술, 인력 부족 속에 여전히 내연기관 의존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정부가 처음으로 국가승인통계로 발표한 자동차 부품산업 실태조사에서 미래차 전환을 추진 중이거나 계획하고 있는 업체 비중이 6.1%에 그친 것으로 나타나면서 한국 자동차 부품산업의 체질 개선이 예상보다 훨씬 더딘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 미래차 시대 선언했지만… 현장은 아직 ‘내연기관 중심’
산업통상자원부와 금융위원회는 14일 서울 서초구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에서 ‘민관합동 미래차 전환 간담회’를 열고 미래차 생태계 전환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산업부 주도의 ‘미래차 부품산업 협의체’가 공식 출범했고, 금융당국은 향후 수년간 대규모 정책금융 공급 계획을 공개했다.
정부는 미래차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완성차뿐 아니라 부품 생태계 전환이 핵심이라고 보고 지원 체계를 대폭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정부 지원 발표보다 더 눈길을 끈 것은 이날 처음 공개된 ‘2025년 자동차 부품산업 실태조사’ 결과였다.
조사에 따르면 국내 자동차 부품산업 규모는 사업체 약 2만1000개, 종사자 45만6000명, 매출액 207조6000억원 수준으로 집계됐다. 외형상 거대한 산업이지만 실제 미래차 중심 재편은 초기 단계에 머무는 모습이다. 국내 자동차 부품업체 가운데 미래차 전환을 추진 중이거나 계획 중인 기업은 전체의 6.1%(1286개사)에 불과했다. 반면 아직 전환 계획이 없는 기업은 93.9%에 달했다.
더 눈에 띄는 부분은 산업 구조다. 내연기관 엔진·변속기 등 내연차 전용 부품업체는 4142개사(19.7%)인 반면, 배터리·라이다 등 미래차 전용 부품업체는 578개사(2.7%)에 그쳤다. 차체와 전장 등 내연기관과 전기차에 모두 쓰이는 공용 부품군이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순수 미래차 중심 생태계는 아직 충분히 형성되지 못한 셈이다.
산업계에서는 완성차 기업의 전기차 전환 속도에 비해 부품 생태계 변화는 훨씬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한 관계자는 “완성차는 미래차 생산 비중을 확대하고 있지만 중소·중견 부품기업 입장에서는 기존 내연기관 납품 물량이 여전히 생존 기반”이라며 “기존 설비를 당장 접기도 어렵고 미래차 투자는 또 해야 하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 부품업계 덮친 ‘이중 투자’ 부담에 업계 울상
부품업계는 목표와 이상의 괴리 앞에서 울상을 짓고 있는 형편이다. 내연기관 부품 수요가 급격히 사라지지 않는 상황에서 기존 생산설비를 유지해야 하는 동시에 미래차 대응을 위한 연구개발(R&D)과 설비 투자까지 병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이를 ‘이중 부담’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업계 관계자들은 “미래차 전환기에 내연차 설비를 유지하면서 미래차 신규 투자도 해야 하는 이중고를 안고 있다”며 자금·인력·R&D·수출 전반에 걸친 지원 확대를 요청했다.
실태조사에서도 이러한 현실은 수치로 확인됐다. 미래차 전환에 나서지 못한 기업들이 꼽은 가장 큰 애로사항은 자금 조달(38.8%)이었다. 이어 기술 경쟁력 부족(29.9%), 인력 확보(29.3%), 판로 개척(25.6%) 등이 뒤를 이었다. 특히 내연기관 전용 부품업체는 기술 부족(35.7%)과 자금 부담(39.5%)을 더 크게 호소했다. 기존 사업모델이 전기차 중심 구조와 맞지 않는 만큼 사업 재편 자체가 쉽지 않다는 의미다.
업계에서는 미래차 전환이 단순한 설비 교체가 아니라 기업 생존 전략의 재설계 수준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자동차 부품업계 관계자는 “예전에는 엔진이나 변속기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소프트웨어, 전장, 배터리, 센서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중소기업이 자체적으로 감당하기에는 투자 규모와 기술 장벽이 높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실을 고려해 정부는 대규모 자금 지원에 나선다. 금융위원회는 올해 미래차 분야 정책금융으로 8조3000억원, 자동차 부품산업 체질 개선 자금으로 9조7000억원을 공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단순 합산하면 올해에만 18조원 규모의 정책금융이 미래차 전환과 산업 구조 개선에 투입되는 셈이다. 여기에 정부는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향후 5년간 모빌리티 분야에 약 15조원 규모 자금을 공급하기로 했다.
정책 방향은 단순 금융지원에 그치지 않는다. 산업부는 이날 산업기술진흥원, 무역보험공사, 코트라,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등 18개 기관이 참여하는 ‘미래차 부품산업 협의체’를 공식 출범시켰다. 협의체는 사업재편, 금융, 수출, 연구개발, 인력 전환, 컨설팅 등을 패키지 형태로 지원하는 플랫폼 역할을 맡게 된다. 기존처럼 부처별·기관별로 흩어진 지원 정책을 한곳에서 연계하겠다는 취지다.
문신학 산업부 차관은 이날 “미래차 시대에도 우리 자동차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품 생태계 뒷받침이 필수적”이라며 “상반기 중 자동차 부품업계 미래차 전환을 위한 종합 지원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권대영 금융위 부위원장 역시 “자동차 산업은 AI·반도체·소프트웨어·데이터 등이 결합된 융복합 첨단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R&D와 인프라 투자, 금융지원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다만 업계 안팎에서는 단순 자금 지원만으로는 구조 전환을 이끌기 어렵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미래차 생태계 전환은 단순한 설비 교체 수준을 넘어 공급망 변화, 기술 인력 재교육, OEM 납품 구조 변화까지 동반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품기업 상당수가 중소 규모라는 점도 부담 요인이다. 실태조사 결과 미래차 전환 추진 기업 비중은 매출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높게 나타났는데, 이는 자금 여력이 전환 속도를 좌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번 정부 지원이 단순한 정책 발표에 그칠지, 실제 부품기업들의 사업 재편을 끌어내는 마중물이 될지가 향후 한국 자동차 산업 경쟁력의 분수령이 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부품 생태계 전환 실패는 곧 완성차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산업의 미래는 더 이상 완성차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부품산업의 전환 속도’가 한국 제조업 경쟁력을 가를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