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세계 경제의 화두는 단연 ‘탈중국’이었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 경쟁이 격화되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공급망 충격이 현실화되면서 글로벌 기업들은 앞다퉈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 결과 중국에 차렸던 공장은 베트남과 인도로 이전했고 미국과 유럽은 반도체와 배터리, 핵심 광물 공급망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속도를 냈다. 중국에 지나치게 의존한 경제 구조가 기업의 가장 큰 위험요인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급속히 확산된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해외 경제계에서 예상 밖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중국을 떠나던 기업들이 다시 중국 기업과 협력을 확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없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글로벌 경영 전략의 중심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 첨단 기술 경쟁의 핵심 축으로 변모하는 데서 기인
변화의 조짐은 5월 들어 해외 주요 매체 보도에서 연이어 포착되고 있다. 27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은 중국 내 유럽 기업들의 사업 심리가 일부 개선되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주중 유럽상공회의소가 발표한 2026년 기업환경 조사에 따르면 “중국 사업 환경이 더 어려워졌다”고 답한 기업 비율은 68%로 나타났다.
여전히 높은 수준이지만 전년 대비 하락했으며,무엇보다 5년 연속 악화하던 기업 심리가 처음으로 반등 조짐을 보였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주중 유럽상공회의소 회장인 옌스 에스켈룬드는 로이터 인터뷰에서 “중국이 최근의 글로벌 변동성 속에서 상대적으로 더 나은 성과를 냈다”며 일부 기업들은 중국 시장의 수익성을 다시 평가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실제 조사에서는 향후 2년 수익 전망에 대해 낙관적이라고 답한 기업 비율이 전년보다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 주목할 만한 메시지는 지난 21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행사에서 나왔다. 미국 투자은행 제이피 모건 체이스의 투자은행 부문 글로벌 공동책임자인 아니 아이엔가는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글로벌 기업들이 혁신적인 중국 기업들과의 파트너십을 점점 더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정학적 긴장과 경제적 불확실성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중국 기업과 협력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아이엔가는 특히 바이오 산업을 대표 사례로 언급했다.
실제로 글로벌 제약업계에서는 중국 바이오 기업과의 라이선스 계약이 최근 몇 년 새 크게 늘고 있다. 서구 제약사 입장에서는 연구개발 비용 부담을 낮추면서도 특허 만료에 따른 신약 파이프라인 공백을 줄일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 중국이기 때문이다. 과거 중국 기업이 단순 생산 파트너 수준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기술 공동개발과 임상시험을 함께 수행하는 수준으로 관계가 진화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 같은 변화는 단순한 분위기 변화가 아니다. 중국 산업 구조 자체가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었다. 값싼 노동력과 대규모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제조업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은 생산기지를 넘어 첨단 기술 경쟁의 핵심 축으로 변모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전기차 배터리, 로봇, 바이오, 첨단 제조 분야에서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 중국 내 규제 변화나 지정학적 긴장은 잠재적 위험 요소
대표적인 사례가 전기차 산업이다. 중국 전기차 기업들은 자국 시장을 기반으로 가격 경쟁력과 기술력을 동시에 확보하며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다. 배터리 공급망 역시 중국 의존도가 여전히 절대적이다. 리튬 정제와 핵심 광물 가공 능력 대부분이 중국에 집중돼 있는 현실에서 글로벌 기업들이 중국을 완전히 배제하는 전략은 현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AI 분야 역시 비슷하다. 미국이 첨단 반도체와 AI 칩 수출 규제를 강화하고 있음에도 중국 기업들은 자체 AI 모델과 응용 서비스 개발에서 빠른 성과를 내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이 가진 방대한 데이터와 빠른 상용화 속도는 글로벌 기업들조차 쉽게 외면하기 어려운 경쟁력으로 평가된다.
그렇다고 이를 곧바로 ‘탈중국 실패’라고 단정하긴 어렵다. 현실은 훨씬 복합적이다. 미국과 유럽은 여전히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 장비와 AI 칩의 대중 수출 통제를 확대하고 있으며, 유럽연합(EU) 역시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공급망 재편 정책을 추진 중이다. 최근 유럽 주요국에서는 중국산 저가 제품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산업 보호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기업들 역시 중국의 정책 리스크를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다. 미·중 갈등이 언제든 다시 격화될 가능성이 있고, 중국 내 규제 변화나 지정학적 긴장 역시 여전히 잠재적 위험 요소다. 때문에 글로벌 기업들의 전략은 ‘중국 복귀’라기보다 공급망 위험은 줄이되 기술과 시장 협력은 유지하는 ‘투트랙 전략’에 가깝다는 분석이 나온다. 생산시설은 인도·베트남·멕시코 등으로 분산하면서도, 연구개발과 기술 협력, 소비시장 접근 측면에서는 중국과 연결을 유지하려는 방식이다.
한국 기업들에겐 이 변화가 더욱 민감하게 다가온다. 한국 경제는 미국 안보 동맹과 중국 시장 의존이라는 두 축 사이에 서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산업 모두 미국과 중국에 깊게 연결돼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규제를 고려하면서도 중국 생산시설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배터리 업계 역시 핵심 소재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도를 단기간에 낮추기 어렵다. 자동차 산업 또한 중국 시장 축소를 고민하면서도 완전 철수는 쉽지 않은 딜레마를 안고 있다.
결국 글로벌 기업들의 대중(對中) 전략은 ‘탈중국’에서 ‘선별적 협력’으로 재조정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생산기지 다변화를 통한 공급망 위험 분산은 이어가되, 첨단 기술과 거대한 시장을 보유한 중국과의 협력은 유지하려는 방향으로 전략이 세분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특히 인공지능(AI), 바이오, 배터리 등 첨단산업에서 중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글로벌 기업들 역시 현실적 선택을 고민하는 모습이다. 미·중 갈등 장기화 속에서도 기술 협력과 시장 접근 필요성이 동시에 커지고 있는 만큼, 기업들의 ‘차이나 전략’은 앞으로 더욱 복합적인 형태로 진화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산업적 이해관계가 깊은 한국 기업들 역시 변화하는 글로벌 공급망 질서 속에서 보다 정교한 대응 전략이 요구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한 국내 기업들의 선택이 향후 경쟁력과 시장 지형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