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AI는 인간의 가장 강력한 생산성 도구가 될 것이다.”
불과 1~2년 전까지만 해도 생성형 인공지능(AI)을 둘러싼 세계 기술 업계의 분위기는 대체로 낙관적이었다. 문서를 자동으로 정리하고 코드를 작성하며 디자인과 번역까지 수행하는 AI는 ‘생산성 혁명’을 이끌 기술로 평가받았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앞다퉈 AI 투자 경쟁에 뛰어들었고 각국 정부 역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국가 전략 마련에 속도를 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2026년 들어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기술에 대한 기대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이면에서 ‘AI 피로감(AI fatigue)’ 혹은 ‘AI 반감(backlash)’이 확산하는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구권을 중심으로 ‘AI가 인간의 노동뿐 아니라 사고 능력까지 대체하려 한다’는 불안이 사회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기술 발전은 좋지만 이에 대응하는 사회적 준비 턱없이 부족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는 28일(현지시간) 공개한 팟캐스트 ‘The backlash against AI’에서 최근의 변화된 기류를 집중 조명했다. 이날 방송에서 FT 외교 칼럼니스트 기디언 라흐만(Gideon Rachman)은 영국 경제·기술 저술가 세바스찬 말라비(Sebastian Mallaby)와의 대담을 통해 “AI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예상보다 빠르게 정치·경제 문제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핵심은 단순한 기술 공포가 아니다. 기술 발전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 속도에 비해 사회적 준비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들었다. 실제로 그는 노동시장과 교육 현장을 AI 반감의 진원지로 꼽았다.
생성형 AI가 기업 내부에서 실제 업무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이를 미래 기술이 아닌 현실의 경쟁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과거 자동화 기술이 제조업과 단순 반복 업무를 중심으로 영향을 미쳤다면 생성형 AI는 문서 작성, 데이터 분석, 번역, 마케팅, 프로그래밍, 법률 검토 등 고학력 사무직 영역으로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자동화와 결이 다르다. 이전에는 육체노동이 대체의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생각하는 노동’ 자체가 변화의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간의 고급 일자리를 AI가 잠식해나간다는 것이다. 당연히 반감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 때문일까. 현재 AI에 대한 반감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집단은 역설적으로 AI 친화적인 세대인 Z세대다. 미국 경제전문 매체 비즈니스 인사이더(Business Insider)는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대학 졸업 시즌을 조명하며 “졸업생들 사이에서 AI에 대한 반감이 눈에 띄게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일부 대학 졸업식에서는 축사 연사들이 AI의 가능성을 강조하자 학생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미 얼어붙은 취업시장에서 AI가 자신들의 진입 기회마저 빼앗고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기업들은 생성형 AI를 활용해 기존에 신입 직원이 담당하던 업무를 자동화하기 시작했다. 회의 요약, 데이터 정리, 시장조사 초안 작성, 단순 보고서 생산 등은 AI가 상당 부분 대체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제는 바로 이 영역이 사회 초년생들의 학습 구간이었다는 점이다.
신입사원은 단순 업무를 통해 조직의 맥락을 배우고 실무 감각을 익힌다. 그러나 기업이 비용 절감과 효율성을 이유로 해당 업무를 AI로 넘길 경우 청년층은 처음부터 경력을 가진 사람만 살아남는 시장과 마주할 수 있다. 영국 싱크탱크 연구자들은 이를 ‘Entry-level erosion(초급 일자리 침식)’ 현상이라고 부른다. 신입이 설 자리가 줄어들수록 사회 이동성 자체가 약화될 수 있다는 경고다.
◆AI 도입 못 멈추는 기업.. 한국도 크게 다를 바 없어
교육계의 우려는 노동시장보다 더 근본적이다. 최근 미국과 영국 대학에서는 학생들의 AI 의존도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디스킬링(deskilling)’ 논쟁이 확산 중이다. 디스킬링은 기술 발전으로 인해 인간 고유 역량이 약화되는 현상을 뜻한다.
쉽게 말해 학생들이 보고서 작성, 자료 분석, 글쓰기, 요약을 AI에 의존하게 되면서 그 반향으로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 자체가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AI 답변을 재정리하는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 교육계에서는 이미 AI 사용 가이드라인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대학은 과제에서 AI 사용 여부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하고 있으며 구술 시험 비중을 늘리는 방식으로 평가 체계를 수정 중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The Guardian) 역시 최근 교육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AI는 계산기를 넘어선 존재라며 인간 사고 체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도구라는 우려를 전했다. 물론 반론도 존재한다. 기술 낙관론자들은 “계산기가 수학을 망치지 않았듯 AI 역시 인간 능력을 증폭시키는 도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복 업무를 줄여 더 창의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AI 도입 속도를 늦추기 어려운 이유는 명확하다. 비용과 생산성이다. 미국 컨설팅 기업 액센추어(Accenture)는 내부 직원 수십만 명에게 AI 활용 교육을 진행했고 일부 업무 영역에서는 AI 활용 능력을 인사평가 요소로 반영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글로벌 투자은행과 로펌, 광고업계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초안 작성이나 데이터 검토 시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글로벌 컨설팅 업계 관계자는 “AI는 사람 한 명을 완전히 대체하는 기술이라기보다 한 사람이 두세 명의 생산성을 내게 만드는 기술”이라며 “문제는 그렇게 되면 기업이 굳이 많은 사람을 채용할 유인이 줄어든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노동시장은 ‘대체’보다 ‘압축’의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람을 전면 해고하기보다 적은 인원으로 더 많은 업무를 수행하는 구조가 강화될 수 있다는 의미다.
AI를 둘러싼 현재 상황을 1990년대 인터넷 보급기와 비교하는 시각도 있다. 당시에도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더 많은 산업과 직업이 탄생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AI 회의론자들은 이번은 다르다고 말한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기술이었다면 생성형 AI는 인간의 판단·창작·분석 영역 자체를 직접 수행하려 한다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른 변화라는 것이다.
기존 기술혁명보다 확산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스마트폰 보급에 약 10년이 걸렸다면 생성형 AI는 2~3년 만에 업무 현장과 교육 시스템에 깊숙이 침투했다. 사회 제도와 법, 교육 체계가 적응할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세계적으로 생성형 AI 도입 속도가 빠른 국가 중 하나다. 대기업과 금융권, 공공기관은 이미 AI 기반 문서 작성과 상담 시스템, 번역, 고객 대응 자동화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취업준비생과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AI를 못 쓰면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커지는 분위기다. 동시에 AI 때문에 초급 업무가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공존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핵심 경쟁력이 ‘AI를 쓰느냐’가 아니라 ‘AI와 협업할 수 있느냐’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다만 이는 또 다른 질문을 남긴다. 모든 사람이 그 변화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 그것이다. AI는 분명 효율의 기술이다. 그러나 효율이 인간성을 압도하는 순간 사회는 예상치 못한 비용을 치를 수도 있다. 해외에서 시작된 ‘AI 반감’ 논쟁이 한국 사회에도 낯설지 않게 들리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