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지난 5월 31일 싱가포르 샹그릴라 호텔. 아시아 최대 안보회의인 샹그릴라 대화 무대에서 일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달라진 모습을 선보여 화제를 모으고 있다. 중국이 일본의 군사력 증강을 겨냥해 '신군국주의' 우려를 제기하자 일본이 곧바로 반격에 나선 것. 중국의 군비 증강과 해양 진출이야말로 아시아 안보를 위협하는 요인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새로운 전략 수립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평을 끌어냈다.
이날 국제사회가 주목한 것은 양국의 설전 자체가 아니었다. 일본이 군사력 확대를 변명하거나 해명하는 대신 공개적으로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약 80년 동안 일본을 규정해 온 '평화국가' 정체성이 새로운 전환점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 "우리가 아니라 중국이 문제" 안보정책 전환에 자신감 보이는 일본
이번 논쟁은 중국 측의 비판에서 시작됐다. 중국은 일본의 방위비 증액과 안보정책 변화를 지적하며 군국주의 회귀 가능성을 경계했다. 일본이 전후 체제를 벗어나 군사대국화의 길을 걷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의 반응은 과거와 달랐다. 일본은 중국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으며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대만해협에서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반박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자국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있으며 장거리 전략폭격기와 같은 공격용 전략자산도 갖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왜 일본만 군국주의 국가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는 문제 제기였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일본 정부는 이런 비판이 제기되면 역사 문제에 대한 반성과 평화헌법의 가치를 먼저 언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국의 위협을 전면에 내세우며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을 적극 설명했다. 국제사회가 주목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본이 군사력 확대를 둘러싼 담론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평화헌법 아래에서 군사력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체제를 유지해 왔다. 자위대를 운용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자국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전력이라는 원칙을 강조했고 방위비와 무기 수출 역시 엄격한 제약 아래 관리됐다.
그러나 중국의 군사적 부상과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이어지면서 일본 내부에서는 기존 안보정책에 대한 회의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변화의 출발점은 2012년 재집권한 아베 신조 전 총리 시절이었다.
아베 정부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안보법제를 통과시키며 전후 안보정책의 틀을 흔들었다. 일본이 직접 공격받지 않더라도 동맹국이 공격받을 경우 일정 조건 아래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길을 연 것이다. 당시 중국과 한국에서는 일본 재무장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지만 일본 사회에서는 안보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여론이 점차 힘을 얻기 시작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했다. 일본 사회는 국제법과 외교만으로 국가 안보를 보장받기 어렵다는 현실을 목격했고 같은 시기 중국은 대만을 둘러싼 군사활동을 강화했고 북한은 미사일 시험발사를 이어갔다.
결국 일본 정부는 2022년 말 국가안보전략을 전면 개정하기에 이른다. 방위비를 대폭 늘리고 적 기지를 타격할 수 있는 반격 능력 확보 방침을 공식화했는데 이는 전후 최대 규모의 안보정책 변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 방산 수출 확대·한일 안보협력 강화.. 동북아 질서 흔드는 일본의 변화
일본의 변화는 군사력 증강에만 머물지 않는다. 최근엔 산업과 외교, 안보 협력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방산 수출 정책이다. 일본은 오랫동안 무기 수출을 사실상 금지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관련 규정을 단계적으로 완화하며 국제 방산시장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영국·이탈리아와 차세대 전투기 공동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향후 다양한 방산 품목의 해외 판매도 검토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책 수정이 아니다. 일본이 스스로를 '안보 제공국'으로 재정의하려는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과거의 일본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에 기여했다면 앞으로는 군사·안보 역량을 활용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역시 중국이 있다. 중국은 이미 세계 2위 규모의 국방비를 지출하고 있으며 해군력과 미사일 전력을 빠르게 확대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대만 유사시가 곧 자국 안보 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동시에 호주·필리핀·인도 등과 안보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자유롭지 않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은 최근 안보 협력을 확대해 왔으며 지난 5월 , 군수지원협정(ACSA) 체결 가능성과 공동 훈련 확대 방안 등을 논의하기도 했다.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중국의 영향력 확대라는 공통 과제가 있는 만큼 협력 필요성은 점차 커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역할 확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는 역사 문제와 연결해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전후 체제를 통해 구축된 지역 안보 균형이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럼에도 일본은 더 이상 과거처럼 군사력 확대를 해명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의 필요성을 적극 설명하고 국제사회의 이해를 구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이번 중·일 공방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일본은 이제 군사력 증강에 대한 비판을 방어하는 국가가 아니라 왜 그것이 필요한지를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전후 80년 동안 일본을 규정해 온 안보적 금기가 서서히 약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단순한 국방 정책을 넘어 일본의 국가 정체성과 동북아 안보 질서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