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세계 태양광 시장을 장악해온 중국 기업들이 에너지저장장치(이하 ESS) 사업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태양광 패널 가격 폭락과 공급 과잉으로 수익성이 악화되자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 나선 것이다. 얼핏 사업 다각화를 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인 의미는 전혀 다르다. 발전 설비 증설이라는 양적 확장이 더 이상 해답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재생에너지 산업의 중심축이 발전설비에서 전력 저장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또한 이것이 향후 글로벌 배터리 시장의 경쟁 구도를 바꿀 변수가 될 것이라는 주장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 4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은 중국 주요 태양광 기업들이 배터리 및 ESS 분야 투자를 공격적으로 확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진코솔라(JinkoSolar), 트리나솔라(Trina Solar), JA솔라(JA Solar) 등은 최근 투자설명회와 사업 전략 발표에서 저장장치를 핵심 성장사업으로 지목했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신사업 진출이 아니라 중국 재생에너지 산업 전반의 구조 전환을 의미한다고 보고 있다.
◆ 세계 휩쓴 태양광, 공급과잉의 부메랑 맞고 휘청
중국은 지난 10여 년간 태양광 산업의 절대 강자로 자리매김해왔다. 폴리실리콘부터 웨이퍼, 셀, 모듈에 이르기까지 공급망 전반을 장악하며 글로벌 태양광 시장의 가격 결정권을 사실상 확보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각국이 탄소중립 정책을 강화하면서 태양광 수요가 급증하자 중국 기업들은 공격적인 증설 경쟁에 나섰다. 그를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지원, 금융권의 대규모 자금 공급도 투자 확대를 뒷받침했다. 이것으로 태양광 시장의 주도권을 오랜 기간 쥘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장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생산능력 확대 속도가 수요 증가 속도를 크게 앞지르면서 공급과잉이 심화됐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일부 태양광 모듈 가격은 최근 2년 사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세계 최대 생산국인 중국 내에서도 가격 경쟁이 과열되면서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됐다.
한때 고수익 산업으로 평가받던 태양광 기업들 가운데 상당수는 지난해부터 실적 부진을 겪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때문에 기업들은 비용 절감과 구조조정에 나서는 동시에 새로운 수익원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분석이다.
ESS가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태양광 패널은 이미 성숙 단계에 접어든 반면 ESS는 이제 막 성장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장조사업체들은 글로벌 ESS 시장이 향후 10년간 두 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무엇보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이 늘어날수록 저장장치 수요도 함께 증가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태양광은 햇빛이 있을 때만 전기를 생산할 수 있고 풍력은 바람의 영향을 받는다. 발전량이 일정하지 않은 재생에너지의 특성상 전력을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공급하는 설비가 필수적이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독일, 영국, 호주 등에서는 대규모 배터리 저장시설 건설이 잇따르고 있다. 과거에는 발전소가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발전소와 저장장치를 함께 구축하는 프로젝트가 빠르게 늘고 있다.
◆ AI가 키운 전력 수요, 새로운 전략 자산으로 떠오른 배터리
ESS 시장의 성장 배경에는 인공지능(AI) 산업의 급성장이 자리하고 있다. 생성형 AI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초대형 데이터센터 건설에 막대한 투자를 쏟아붓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전력을 필요로 하며 전력 소비량도 기존 시설보다 훨씬 크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최근 보고서에서 AI와 데이터센터 확산이 향후 전력 수요 증가의 핵심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에서는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일부 지역 전력망 운영의 주요 변수로 떠오르고 있으며, 전력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ESS 투자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이는 재생에너지와 저장장치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과거 ESS가 태양광과 풍력의 보조 설비였다면 이제는 AI 시대 전력망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중국 기업들이 ESS 사업에 적극 뛰어드는 것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단순히 태양광 사업의 대안을 찾는 차원을 넘어 미래 전력 시장의 주도권 경쟁에 참여하려는 전략적 판단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번 변화는 한국에도 적지 않은 파장을 미칠 전망이다. 그동안 국내 배터리 업계는 전기차 시장 성장 둔화 속에서 ESS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육성해왔다. 실제로 미국과 유럽에서는 전력망 안정화와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대규모 ESS 프로젝트가 잇따라 추진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삼성SDI, SK온 등 국내 기업들도 관련 사업 확대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는 중국산 제품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한국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기대도 존재한다.
하지만 중국 기업들의 본격 진출은 새로운 경쟁을 의미한다. 중국 업체들은 배터리 셀뿐 아니라 태양광 패널, 전력변환장치(PCS), 에너지관리시스템(EMS)까지 통합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가격 경쟁력 역시 강점으로 꼽힌다. 글로벌 재생에너지 프로젝트 발주처 입장에서는 발전설비와 저장장치를 한꺼번에 공급받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일 수 있다.
다만 중국 기업들의 앞길도 순탄하지만은 않다. 미국은 중국산 태양광 제품과 배터리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으며 유럽도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에너지 안보와 산업 보호를 이유로 중국 의존도를 낮추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향후 ESS 시장이 기술 경쟁뿐 아니라 통상 정책과 지정학적 갈등의 영향을 크게 받는 분야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중국 태양광 기업들의 ESS 진출은 특정 기업의 사업 전략 변화를 넘어선 사건이다.
태양광 패널이 재생에너지 시대의 상징이었다면 앞으로는 전력 저장 능력이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의미다. 발전설비를 얼마나 많이 설치하느냐보다 생산된 전기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저장하고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