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AI 경쟁은 더 이상 누가 더 뛰어난 모델을 만드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더 많은 전기를 확보하고, 더 많은 서버를 돌릴 수 있느냐의 문제다.“
최근 글로벌 정보기술(IT) 업계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이야기다. 챗GPT를 비롯한 생성형 인공지능(AI)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경쟁의 무게중심이 소프트웨어에서 인프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AI 모델이 산업의 '두뇌'라면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은 이를 움직이는 '심장'에 가깝다.
실제로 최근 아시아 주요 언론과 시장조사업체들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데이터센터 투자 확대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AI 서비스 확대를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설비투자를 집행하면서 동남아시아가 새로운 AI 허브로 떠오르고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에서는 "20세기 제조업 시대의 공장이 중국이었다면, 21세기 AI 시대의 공장은 데이터센터"라는 말까지 나온다. 과거 국가 경쟁력이 공장과 항만에서 결정됐다면 이제는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의미다.
AI 열풍이 불러온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해 발표한 「Energy and AI」 보고서에서 전 세계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2024년 415TWh에서 2030년 945TWh로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현재 일본 전체 전력 소비량을 웃도는 수준이다.
IEA는 보고서에서 AI가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 증가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AI 산업이 성장할수록 데이터센터가 더 많이 필요하고,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전력이 필요해지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 싱가포르 넘치는 수요, 조호르가 흡수한다
이 같은 흐름을 가장 빠르게 읽은 나라 가운데 하나가 싱가포르다. 싱가포르 일간지 스트레이츠타임스는 지난 2일 싱가포르 정부가 약 15만 명 규모 공공부문을 대상으로 AI 에이전트 등록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부기술청이 추진하는 이 제도는 공무원들이 사용하는 AI의 역할과 권한, 업무 내역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장치다.
표면적으로는 행정 혁신 정책이지만 업계에서는 이를 국가 차원의 AI 전략 강화 움직임으로 해석한다. AI를 경제 성장의 핵심 축으로 삼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는 평가다. 실제로 싱가포르는 이미 아시아 최대 데이터센터 허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싱가포르 디지털개발정보부(MDDI)가 지난 2월 의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싱가포르에는 70개가 넘는 데이터센터가 운영 중이며 총 데이터센터 용량은 1.4GW를 넘어선다.
문제는 성공이 오히려 새로운 제약을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싱가포르 국토 면적은 약 735㎢로 서울보다 조금 넓은 수준에 불과하다. 좁은 국토에 데이터센터가 집중되면서 전력 수요와 부지 부족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
싱가포르 경제개발청(EDB)은 이미 70개 이상의 데이터센터가 운영 중이며 추가 용량 확보를 위해 친환경·고효율 프로젝트 중심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에는 데이터센터 용량을 3분의 1 이상 확대하겠다고 발표하면서도 에너지 효율을 핵심 조건으로 제시했다.
최근에는 주롱섬(Jurong Island)에 최대 700MW 규모의 친환경 데이터센터 단지를 조성하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AI 산업 육성을 위해 데이터센터는 필요하지만, 전력과 환경 부담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싱가포르 정부와 업계는 데이터센터의 양적 확대보다 효율성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싱가포르의 고민은 역설적으로 말레이시아의 기회가 되고 있다. 최근 글로벌 데이터센터 업계가 가장 주목하는 지역은 말레이시아 남부 조호르다. 싱가포르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조호르는 넓은 부지와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력 비용을 무기로 급성장하고 있다.
말레이시아 현지 언론과 글로벌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조호르는 현재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데이터센터 시장으로 평가받는다. 업계에서는 이미 싱가포르와 조호르를 하나의 데이터센터 권역으로 본다. 금융·통신·네트워크 기능은 싱가포르가 맡고, 대규모 서버 시설은 조호르에 구축하는 방식이다. 과거 제조업 공급망이 국가 간 분업 체계를 형성했던 것처럼 AI 산업에서도 새로운 분업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시장조사업체 아리즈톤은 올해 초 발표한 보고서에서 말레이시아 데이터센터 시장 규모가 2025년 61억 달러 수준에서 2031년 114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조호르가 싱가포르의 대체 거점 역할을 하며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최근 수년 사이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아마존웹서비스(AWS), 오라클 등 글로벌 기업들은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중심으로 AI 및 클라우드 인프라 투자를 확대해왔다. 데이터센터 투자 경쟁은 이제 국가 간 산업 정책 경쟁의 성격까지 띠고 있다.
과거에는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세제 혜택을 제공했다면 이제는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기 위해 전력망과 통신망, 부지 공급 계획을 내놓는 시대가 된 것이다. AI 산업이 성장할수록 데이터센터는 국가 경제의 핵심 인프라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 AI 경쟁의 병목은 반도체 아닌 전력
AI 산업 초기만 해도 최대 관심사는 반도체였다. 누가 더 많은 GPU를 확보하느냐가 경쟁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업계에서는 AI 산업의 가장 큰 병목 현상이 반도체가 아니라 전력 공급 능력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IEA는 데이터센터 전력 소비가 향후 5년 동안 연평균 약 15%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AI 서버가 전체 증가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것으로 분석했다. 학계에서도 비슷한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올해 발표된 연구에서는 AI 데이터센터가 특정 지역에 집중될 경우 지역 전력망에 상당한 부담을 줄 수 있으며, 향후 AI 인프라가 전력 시스템 자체를 좌우하는 변수로 부상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미국과 유럽에서도 데이터센터 건설 계획이 전력망 문제로 지연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결국 AI 시대의 핵심 자원은 반도체뿐 아니라 전력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동남아 데이터센터 경쟁은 한국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AI 데이터센터에는 막대한 양의 반도체가 필요하다. 특히 엔비디아 AI 가속기에 탑재되는 고대역폭메모리(HBM)는 AI 서버의 핵심 부품으로 꼽힌다. 현재 글로벌 HBM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도하고 있다.
데이터센터가 늘어난다는 것은 결국 AI 서버가 늘어난다는 의미다. 그리고 AI 서버 증설은 한국 메모리 반도체 수요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 규모는 이미 기존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AI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해 2025 회계연도에 약 8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으며, 구글 모회사 알파벳도 AI 인프라 확대를 위해 대규모 자금 조달과 설비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 등 4개 기업의 AI 관련 투자 규모가 2030년까지 5조30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단순한 IT 산업 투자라기보다 새로운 산업혁명 수준의 인프라 투자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 산업혁명 시대에 철도와 항만이 국가 경쟁력을 결정했다면 오늘날에는 데이터센터와 전력망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은 단순한 투자 유치전이 아니다. AI 시대 아시아의 산업 지도와 공급망이 어떻게 재편될지를 보여주는 전초전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