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세계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최근 몇 년간 그리 밝지 않았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장기화하고 있고 중동과 유럽에서는 지정학적 긴장이 이어지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은 여전히 불안정하며 주요 선진국들도 저성장과 고물가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해외에서는 한국을 예외적인 사례로 주목하고 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이하 FT)는 지난 8일(현지시간) '칩과 배, 그리고 무기(Chips, Ships and Guns)'라는 제목의 분석 기사에서 한국을 "현재 세계 경제의 승자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했다. FT는 인공지능(AI) 경쟁과 글로벌 재무장 흐름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변화가 한국 경제에 예상 밖의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한국 경제는 올해 1분기 전년 동기 대비 3.6% 성장하며 지난해 4분기 1.6% 성장에서 큰 폭으로 개선됐다. 수출은 38% 증가한 2200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FT는 이러한 성장세의 중심에 반도체와 조선, 방산 산업이 있다고 진단했다.
특정 매체의 진단에 불과하지만 전반적인 국외의 시선은 이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국내의 시선은 대체로 냉정한 것이 사실이다. 청년 실업과 저출산, 부동산 문제, 내수 부진 등 구조적 과제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FT가 주목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세계가 AI와 안보라는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한국이 전략 산업 분야에서 예상보다 강한 경쟁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는 국내에서 체감하는 경제 상황과 해외 투자자들이 바라보는 한국 경제 사이에 상당한 온도 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AI 시대 올라탄 반도체, 세계가 주목한 한국의 성장 엔진
FT가 가장 먼저 주목한 분야는 반도체다. 현재 글로벌 경제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키워드는 AI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은 AI 데이터센터 구축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고 있으며, 각국 정부도 AI 인프라 투자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분야 중 하나가 메모리 반도체다.
AI 서버는 기존 서버보다 훨씬 많은 데이터를 처리해야 한다. 이 때문에 고성능 메모리인 HBM(고대역폭메모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 시장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FT에 따르면 올해 4월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수출은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으며, AI 투자 확대가 직접적인 배경으로 지목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은 각각 1조 달러를 넘어 세계 20대 기업 반열에 올랐다.
AI 붐의 수혜는 비단 반도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데이터센터 건설이 늘어나면서 초고압 변압기 수요도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FT는 한국의 전력기기 기업들이 글로벌 데이터센터 건설 붐의 간접 수혜를 입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효성중공업과 HD현대일렉트릭, LS일렉트릭 등은 최근 몇 년 동안 주가와 실적이 크게 개선됐다.
로이터 역시 최근 AI 반도체 호황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이 급증하면서 정부 세수까지 크게 늘어났다고 보도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AI와 반도체 산업에서 발생한 세수 증가분을 활용해 새로운 국가 투자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결국 해외 언론이 바라보는 한국의 강점은 단순히 반도체를 잘 만드는 국가라는 수준을 넘어선다. AI 시대에 필수적인 메모리와 전력 인프라 공급망을 동시에 확보한 몇 안 되는 국가라는 점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다.
◆ 조선·방산이 만든 두 번째 성장축에도 안심은 금물
FT가 주목한 또 다른 분야는 조선과 방산이다. 세계 곳곳에서 지정학적 갈등이 이어지면서 각국은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국가들의 국방 예산은 크게 늘어났고 중동과 아시아에서도 안보 불안이 확대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 방산 기업들은 빠르게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FT는 한국 무기의 가장 큰 강점으로 가격 경쟁력과 신속한 납기 능력을 꼽았다. 실제로 한국은 폴란드와 대규모 방산 계약을 체결했고 중동 국가들과도 다양한 무기 수출 협상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업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한때 한국 조선업은 중국의 저가 공세에 밀려 위기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과 군함, 고부가가치 특수선 분야에서 경쟁력을 유지하며 다시 호황을 맞고 있다.
FT는 특히 미국 해군의 함정 유지·보수 역량이 약화되면서 한국 조선업체들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 내 조선소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국 기업들이 중요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흐름은 한국 경제의 산업 구조가 생각보다 탄탄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많은 국가들이 AI 산업 하나에 의존하고 있는 반면 한국은 반도체와 조선, 방산이라는 세 개의 성장축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 AI 투자 확대와 글로벌 군비 증강이라는 서로 다른 흐름이 동시에 한국 산업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FT는 장밋빛 전망만 내놓지는 않았다. 기사에서 가장 반복적으로 언급된 위험 요인은 중국이다. 중국은 이미 전기차와 배터리, 철강, 석유화학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을 강하게 추격하고 있다. 과거 한국이 강점을 보였던 산업 상당수가 중국의 저가 공세와 기술 발전에 직면해 있다. FT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한국이 경쟁 우위를 유지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산업을 개척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현재의 호황이 한국 경제 전체에 고르게 퍼지고 있는지도 논쟁거리다. 반도체와 방산 기업들의 실적은 사상 최고 수준이지만 자영업과 내수 시장은 상대적으로 부진하다. 청년층이 체감하는 고용 환경 역시 여전히 녹록지 않다. 해외 투자자들이 바라보는 한국 경제와 국민들이 체감하는 경제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FT가 한국을 주목한 이유는 분명하다. AI 혁명과 지정학적 재편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변화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세계 공급망의 핵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반도체를 만들고, 군함을 건조하고, 무기를 생산할 수 있는 제조업 역량을 동시에 갖춘 국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결국 FT의 분석은 단순히 한국 경제가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질서가 바뀌는 순간마다 한국이 새로운 기회를 포착해 왔듯이 AI와 안보가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에도 한국이 예상 밖의 수혜자가 되고 있다는 진단에 가깝다.
다만 그 기회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지금의 호황이 일시적 특수에 그칠지, 아니면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을지는 결국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고 다음 먹거리를 얼마나 빨리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