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중동 정세 불안이 장기화되면서 세계 에너지 시장의 질서가 바뀌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업들이 전기차와 전기보일러, 전기 공정 도입을 확대하는 이유는 탄소배출 감축과 ESG 경영 때문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기업들이 전기화(Electrification)에 투자하는 가장 큰 이유가 기후변화 대응이 아니라 에너지 안보와 비용 안정성이라는 분석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이하 FT)는 글로벌 기업 경영진 약 2,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를 인용해 응답자의 91%가 "전기화가 기업의 에너지 안보를 강화한다"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조사에 참여한 기업들은 전기화가 단순한 친환경 전략을 넘어 지정학적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핵심 경영 전략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세계 경제가 직면한 현실을 반영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은 천연가스 공급 위기를 겪었고, 최근에는 중동 갈등으로 원유와 액화천연가스(LNG) 공급망에 대한 불안이 다시 커지고 있다. 세계 각국 기업들이 화석연료 가격 변동과 공급 충격에 흔들리지 않는 체계를 구축하려 하면서 전기화가 새로운 해법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에너지 전환의 목표가 바뀌고 있다"고 분석한다. 과거의 에너지 전환이 탄소중립과 환경보호를 위한 선택이었다면 이제는 기업의 생존과 국가 경쟁력을 위한 필수 전략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 탄소중립에서 에너지 안보로..바뀐 기업들의 계산법
에너지 전환 정책은 오랫동안 환경 문제와 연결돼 있었다. 2015년 파리기후협약 이후 주요국 정부와 기업들은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기차 보급, 산업 전기화를 추진해 왔다. 당시에는 기후위기 대응이 핵심 명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에너지 안보가 새로운 동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환점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었다.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직접 경험했다. 독일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주요국은 가스 공급 축소로 전력 가격이 급등했고 일부 산업은 생산 차질까지 겪었다. 에너지 가격 상승은 제조업 경쟁력 약화와 물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당시 유럽 각국은 LNG 수입 확대와 재생에너지 투자에 나섰지만 더 근본적인 교훈을 얻었다. 특정 국가나 특정 자원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경제 전체를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최근 중동 정세 불안 역시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국제유가는 출렁이고 있다. LNG 수입국들은 공급망 불안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FT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기업들이 에너지 전략의 우선순위를 바꾸고 있다고 분석했다. 과거에는 "어떻게 탄소를 줄일 것인가"가 핵심 질문이었다면 이제는 "어떻게 외부 충격에 흔들리지 않을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경영 과제가 됐다는 것이다.
조사에 참여한 기업 경영진들은 전기화의 가장 큰 장점으로 가격 예측 가능성을 꼽았다. 태양광과 풍력, 배터리, 전기 설비는 초기 투자비가 크지만 일단 구축되면 국제 유가나 가스 가격 변동에 대한 의존도를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 업계에서는 이를 "탈탄소화보다 탈지정학화(de-geopoliticiza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 특정 산유국이나 가스 공급국의 정치적 상황이 기업 경영에 미치는 영향을 줄이는 것이 전기화의 새로운 목적이 되고 있다는 의미다.
◆ 제조업 강국들의 선택..전기화가 경쟁력이 되다
전기화는 더 이상 자동차 산업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철강과 화학, 시멘트, 식품, 물류 등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는 산업 전반에서 전기 기반 설비 전환이 확대되고 있다. 전기보일러와 전기 용광로, 전기 히트펌프, 전기 운송장비 도입이 대표적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향후 10년간 전기화가 글로벌 에너지 수요 구조를 바꾸는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산업 공정과 운송 부문의 전기화는 화석연료 소비 감소뿐 아니라 국가 차원의 에너지 자립도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제조업 강국들은 전기화를 산업 경쟁력과 연결해 접근하고 있다. 독일은 산업용 히트펌프 보급을 확대하고 있으며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전기차와 청정에너지 설비 투자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중국 역시 전기차와 배터리 산업 육성을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면서 에너지 안보 강화 효과를 동시에 노리고 있다.
FT는 "전기화는 더 이상 환경 정책의 부속물이 아니라 산업 정책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국가 차원에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이 제조업 경쟁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데이터센터와 인공지능(AI) 산업의 성장도 전기화 수요를 키우고 있다. AI 산업은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기업들로 하여금 자체 발전 설비와 에너지 효율 개선에 투자하도록 만들고 있다. 에너지 확보 능력 자체가 기업 경쟁력의 일부가 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역시 이러한 변화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국은 세계적인 제조업 강국이지만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원유와 LNG 수입 비중이 높고 국제 에너지 가격 변동에 민감한 구조를 갖고 있다. 실제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내 전기요금과 가스요금 인상 압력이 커졌고 산업계 역시 에너지 비용 부담을 호소해 왔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한국에서도 전기화를 단순한 탄소중립 정책이 아니라 산업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만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전기화가 확대될수록 안정적인 전력 공급망 구축이 중요해진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송배전망 투자, 에너지 저장장치(ESS) 확충, 원전 활용 여부 등 복합적인 정책 논의가 필요하다. 전기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충분하고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 일간지 더타임스는 최근 분석에서 "높은 전기요금은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실제로 기업들이 전기화를 선택하더라도 전력 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기대했던 효과를 거두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전기화는 단순한 기술 변화가 아니라 경제 구조 전체를 바꾸는 과정에 가깝다. 전기차를 더 많이 보급하거나 공장 설비를 교체하는 수준을 넘어 국가의 에너지 시스템과 산업 전략을 새롭게 설계해야 하는 문제다.
세계 기업들은 이미 방향을 정한 모습이다. FT 조사에서 확인된 것처럼 기업들은 전기화를 더 이상 환경을 위한 비용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투자로 인식하고 있다.
한때 에너지 전환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미래 전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러시아 전쟁과 중동 위기를 거친 지금, 전기화는 점점 더 현재의 생존 전략으로 바뀌고 있다. 세계 기업들이 전기로 향하는 이유는 더 이상 '친환경'이라는 한 단어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