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세계 식량시장이 다시 한번 기후 리스크의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곡물 생산지가 가뭄과 이상고온으로 생산 차질 우려에 직면한 가운데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인 인도는 사상 최대 수준의 곡물 재고를 축적하며 국제 식량시장의 새로운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해외 농업·원자재 시장에서는 "세계는 가뭄을 걱정하는데 인도만 곡물을 쌓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주요 생산국들이 기후변화 충격을 받는 상황에서 인도는 오히려 풍부한 생산량과 대규모 비축을 바탕으로 공급 안정자 역할을 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 미국 밀 생산 '경고등' 1957년 이후 최저 수준 전망
미국 농무부(USDA)는 지난 11일 발표한 월간 농산물 수급 전망 보고서에서 겨울밀 생산량 전망치를 하향 조정했다. 특히 미국 밀 산업의 핵심 품종인 하드 레드 윈터 밀 생산량은 약 4억9700만 부셸로 예상됐다. 이는 1957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믿기 힘든 수치다. 미국 중남부 평원지대는 세계적인 밀 생산지로 꼽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들어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등 주요 생산지역에서 강수량 부족이 이어지면서 작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시장에서는 단순히 생산량 감소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밀 품질 저하 가능성까지 제기되면서 국제 제분업체와 식품기업들이 원료 확보에 긴장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밀 수출시장에서 여전히 핵심 공급국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미국산 밀 공급 감소는 국제 가격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유럽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 로이터는 17일 슬로바키아 농민들이 역대 가장 이른 시기에 보리와 완두콩 수확에 돌입했다고 보도했다. 언뜻 보면 수확이 빨라진 것이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작물이 충분히 성장하기 전에 고온과 가뭄으로 성숙 단계에 도달하면서 생산량 감소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지 농업 관계자들은 올해 봄 가뭄을 관측 기록상 가장 심각한 수준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독일, 폴란드, 체코 등 중부 유럽 지역 역시 토양 수분 부족 문제가 보고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세계 최대 농산물 수출권역 가운데 하나인 만큼 생산 차질이 현실화될 경우 글로벌 곡물 수급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엘니뇨 변수까지 더해지고 있다. 기상 전문가들은 태평양 해수면 온도 상승에 따라 엘니뇨가 다시 강화될 가능성을 주시하고 있다. 엘니뇨는 세계 농업 생산을 뒤흔드는 대표적인 기후 현상이다. 동남아시아와 호주 지역에는 가뭄을, 남미 일부 지역에는 집중호우를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인도네시아 정부는 쌀 생산 차질을 우려해 조기 파종 확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아시아 각국이 식량안보 확보에 나서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세계은행과 국제식량정책연구소(IFPRI) 등 국제기구들도 최근 보고서를 통해 기후변화가 농산물 공급망 불안정을 구조화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인도, 사상 최대 곡물 확보.. 세계 식량시장 중심축 이동하나
그러나 이런 불안 속에서도 인도만은 예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로이터가 16일(현지시간) 보도한 인도 정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6월 1일 기준 인도의 정부 보유 쌀 재고는 6843만 톤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대비 약 15% 증가한 수치이자 사상 최고 수준이다. 같은 기간 밀 재고는 5341만 톤으로 2021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쌀과 밀 모두 정부 목표치를 크게 웃돌고 있다.
익히 알 듯 인도는 국제 쌀 거래량의 약 40%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쌀 수출국이다. 그러나 2022년 이후 인도는 자국 물가 안정을 위해 여러 차례 쌀 수출 제한 조치를 시행하면서 국제 시장에 큰 충격을 줬다. 실제로 당시 국제 쌀 가격은 수년 만의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최근 생산량 증가와 재고 확대에 힘입어 수출 규제를 상당 부분 해제했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인도가 향후 국제 곡물시장의 가격 안정 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를 두고 전문가들은 단순한 수급 문제를 넘어 국제 식량 질서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 세계 곡물시장은 미국이 사실상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도, 브라질 등 신흥 농업 강국의 존재감이 빠르게 커지고 있다.
특히 인도는 막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한 내수시장과 정부 주도의 비축 정책을 활용해 식량안보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식량이 에너지 못지않은 전략 자산으로 평가받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인도의 정책 변화는 국제 원자재 시장 전체를 흔드는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곡물 자급률이 극도로 낮은 한국 입장에선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한국의 곡물 자급률은 주요 선진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다. 밀 자급률은 1% 안팎에 불과하며 옥수수와 대두 역시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한다. 때문에 국제 곡물 가격 상승은 곧바로 국내 식품업계와 축산업계 비용 증가로 연결된다. 빵, 라면, 과자, 식용유, 육류 가격까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인도의 대규모 재고는 국제 식량시장에 일정한 완충 역할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과 유럽의 생산 감소가 현실화되더라도 인도가 수출을 확대할 경우 공급 충격을 일부 흡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올해 세계 곡물시장은 기후변화와 지정학, 그리고 인도의 비축 전략이 맞물리는 복합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미국 밀밭은 말라가고 유럽 농가는 조기 수확에 나서고 있다. 반면 인도는 거대한 곡물 창고를 채우고 있다. 세계 식량지도가 다시 그려지는 가운데 국제 시장은 이제 인도의 선택을 주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