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전기차 확산과 탄소중립 정책에도 불구하고 세계 석유 수요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국제사회에서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석유수출국기구(이하 OPEC)는 에너지 전환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으며 신흥국 경제 성장에 따라 석유 소비가 꾸준히 확대될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이번 전망은 세계 에너지 정책 방향을 둘러싸고 영향력을 행사해 온 국제에너지기구(IEA)의 분석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석유 수요가 조만간 정점을 찍을 것이라는 IEA의 관측과 달리 OPEC은 최소 2050년까지는 석유 수요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면서 글로벌 에너지 시장을 둘러싼 논쟁이 다시 불붙고 있다.
◆ 석유종말론 주장 IEA와 갈리는 미래 전망 제시
OPEC이 지난 18일(현지시간) 발표한 '세계 석유 전망(World Oil Outlook) 2026'에 따르면 세계 석유 수요는 올해 하루 평균 1억510만 배럴 수준에서 2030년 1억1330만 배럴, 2050년에는 1억2400만 배럴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이는 지난해 전망치보다도 소폭 상향 조정된 수치다.
OPEC은 보고서에서 최근 수년간 에너지 정책의 우선순위가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갈등을 거치면서 각국 정부가 탄소중립 목표뿐 아니라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 확보에도 무게를 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에너지 가격 급등을 경험한 국가들이 현실적인 공급망 구축에 집중하면서 석유와 천연가스의 역할이 예상보다 오래 유지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실제로 유럽에서는 전기차 판매 증가세가 최근 둔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전기차 보조금 축소와 충전 인프라 부족 문제가 부각되면서 소비자들의 구매 속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역시 친환경 정책 기조 변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진 상태다.
OPEC은 특히 선진국보다 신흥국의 성장세에 주목하고 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인구 증가와 도시화, 산업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자동차 보급 확대와 항공 수요 증가, 물류 산업 성장 등을 감안하면 상당 기간 석유 소비 증가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가 더욱 관심을 끄는 이유는 IEA의 장기 전망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IEA는 최근 수년간 전기차와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를 근거로 세계 석유 수요가 2030년 전후 정점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해 왔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 비용이 급격히 하락하고 배터리 기술이 발전하면서 화석연료 의존도가 점차 감소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반면 OPEC은 에너지 전환 속도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석유가 단순히 자동차 연료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석유화학 산업, 항공·해운 운송, 산업용 연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항공 산업은 아직 대규모 대체 기술이 부족한 만큼 장기간 석유 의존도가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시장에서는 결국 양측의 전망 차이가 에너지 전환 자체를 둘러싼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한다. IEA가 정책 목표와 기술 발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면 OPEC은 실제 소비 패턴과 경제 성장 흐름에 더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 AI 시대도 석유 수요 변수로 부상
최근에는 인공지능(AI) 산업의 급성장도 에너지 수요 전망에 새로운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대규모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인프라 확대로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미국과 중동, 아시아 각국에서는 발전 설비 증설이 잇따르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가 진행되고 있지만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 천연가스와 석유 기반 발전이 일정 기간 병행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부 에너지 기업들은 AI 산업 성장으로 전력 수요가 예상보다 빠르게 늘어날 경우 천연가스와 석유 수요 감소 시점도 뒤로 밀릴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미국 에너지 업계에서는 데이터센터 건설 붐이 LNG 투자 확대의 새로운 배경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기차와 재생에너지 확산이 석유 산업의 구조적 쇠퇴를 앞당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다. 에너지 소비 구조가 복잡해지면서 단순히 전기차 판매량만으로 석유 수요를 예측하기 어려워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OPEC은 장기 수요 전망과 함께 석유 산업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 필요성도 강조했다. 보고서는 2050년까지 전 세계 석유 산업에 약 17조7000억달러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에너지 전환 논의 속에서 석유·가스 분야 투자가 급격히 줄어들 경우 오히려 공급 부족과 가격 급등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경고다.
실제로 최근 수년간 국제 유가는 지정학적 위기 때마다 큰 폭으로 출렁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갈등, 홍해 항로 위기 등은 에너지 공급망이 여전히 지정학적 위험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석유 생산국들은 이러한 경험을 근거로 충분한 생산 능력 유지가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도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환경단체와 일부 국제기구는 화석연료 투자가 확대될 경우 탄소중립 목표 달성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고 반박한다.
전문가들은 OPEC과 IEA 가운데 어느 쪽 전망이 맞을지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전기차 보급 속도와 배터리 기술 발전, 수소 경제 확산 여부, 각국 정부의 기후 정책 변화 등이 향후 수요를 결정할 핵심 변수로 꼽힌다.
다만 이번 OPEC 전망은 세계가 탄소중립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에도 에너지 전환이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점을 다시 보여준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에너지 안보와 경제 성장, 기후 대응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해야 하는 상황에서 석유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