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드

2억6600만명 식량 불안..글로벌 공급망 흔들린다

유엔, 전쟁·기후위기 노출된 13개 지역 기아 위험 경고
곡물 확보 경쟁 속 한국도 공급망 불안 직격탄 맞을 수도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식량이 다시 안보의 최전선으로 떠오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식량위기는 주로 개발도상국의 빈곤 문제로 여겨졌지만 이제 국제사회는 곡물을 에너지·반도체·희토류와 같은 전략 자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전쟁과 기후위기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주요 국가들이 곡물 확보 경쟁에 뛰어들면서 식량안보는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급부상하고 있다.

 

실제로 유엔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 약 2억66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놓여 있다고 밝혔다.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은 지난 17일(현지시간) 공동 보고서 ‘Hunger Hotspots’를 발표하며 수단, 가자지구, 남수단, 아이티 등 13개 지역을 ‘최고 위험 식량위기 지역’으로 지정했다.

 

두 기구는 향후 수개월 내 일부 지역에서 기근 수준의 식량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무력 충돌, 기후변화, 경제 불안, 국제 원조 감소가 동시에 작용하면서 세계 식량 시스템이 새로운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더 나아가 보고서는 이러한 위기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국제 곡물 시장과 공급망 전반에 파급 효과를 미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곡물 가격 급등은 에너지·원자재 시장과 맞물려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정치적 불안정과 난민 문제를 심화시킬 수 있다. 전문가들은 각국 정부가 단기적 구호를 넘어 장기적 식량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후변화 대응, 농업 생산성 제고, 국제 협력 강화 없이는 식량안보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 전쟁·기후위기 겹치며 공급망 흔들
식량위기는 더 이상 특정 지역의 인도주의적 문제에 머물지 않고 있다. 국제 곡물시장이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된 상황에서 지역 분쟁과 이상기후는 전 세계 식품 가격과 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다. 우크라이나는 전쟁 이전 세계 최대 곡물 수출국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밀과 옥수수, 해바라기유 등 주요 농산물을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 국가들에 공급해 왔다. 그러나 전쟁 이후 흑해 항만이 반복적으로 위협받고 수출 통로가 제한되면서 국제 곡물 가격은 큰 폭의 변동성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곡물 생산과 물류망 모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 최근 중동 지역 긴장 고조까지 겹치면서 식량 공급망에 대한 우려는 더욱 커지는 분위기다.

 

기후변화 역시 식량 생산을 위협하는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 세계기상기구(WMO)에 따르면 최근 수년간 주요 곡물 생산지에서는 폭염과 가뭄, 집중호우가 반복되고 있다. 미국 중서부와 남미, 동남아시아 등 주요 농업 지역에서 이상기후가 빈번해지면서 생산량 예측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농업 생산은 기후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밀과 옥수수, 대두 등 주요 곡물은 파종과 개화, 수확 시기에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발생할 경우 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할 수 있다. 과거에는 특정 지역의 흉작이 다른 지역 생산량 증가로 어느 정도 상쇄됐지만 최근에는 이상기후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발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 우려를 키우고 있다.

 

국제 식량시장 전문가들은 "식량위기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고 진단한다. 과거에는 일시적 공급 부족이 문제였다면 현재는 기후와 지정학적 갈등, 물류 차질이 동시에 발생하는 구조적 위험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 식량도 전략자산 인식 속에 각국 확보 경쟁 가속
주요 국가들이 식량을 전략자산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도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에너지와 반도체, 핵심 광물 확보 경쟁이 치열해진 것처럼 식량 역시 국가 안보 차원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실제 일부 국가들은 국제 가격 급등에 대응하기 위해 수출 제한 조치를 도입하고 있다. 인도는 세계 최대 쌀 수출국 가운데 하나지만 최근 몇 년간 자국 내 물가 안정을 이유로 쌀 수출 규제를 시행했다. 다른 곡물 생산국들 역시 필요할 경우 수출 통제에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조치가 국제 시장 불안을 더욱 확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생산국이 자국 수급 안정을 우선할 경우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은 곧바로 공급 부족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유럽연합(EU)과 일본 등 주요 수입국들이 식량안보 전략을 강화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유럽은 역내 농업 생산기반 유지에 정책적 지원을 확대하고 있으며 일본 역시 국가 차원의 식량 비축 확대와 해외 농업 투자에 나서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앞으로 식량 확보 경쟁이 에너지 확보 경쟁만큼 중요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히 기후변화가 장기화될 경우 농업 생산성이 낮아지고 경작 가능한 토지가 줄어들 가능성이 있어 식량 문제는 향후 수십 년간 주요 지정학적 변수 가운데 하나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고민은 한국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한국 역시 식량안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의 국내 쌀 자급률은 비교적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밀과 옥수수, 대두 등 주요 곡물은 대부분 해외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축산업에 필요한 사료용 곡물 역시 상당량을 외국에서 들여오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제 곡물 가격 변동은 국내 식품 물가와 직결된다. 실제 2022년 이후 국제 곡물 가격이 급등했을 당시 식품업계는 원재료 비용 부담 증가를 이유로 제품 가격을 잇달아 인상했다. 빵과 라면, 과자, 식용유 등 생활 밀착형 식품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소비자 부담도 커졌다.

 

전문가들은 식량안보를 단순히 농업 정책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에너지와 공급망, 물가 안정 정책을 아우르는 국가 전략 차원에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역시 주요 곡물 비축 확대와 수입선 다변화, 해외 농업 개발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세계 식량시장의 구조적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추가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식량위기가 다시 국제사회의 핵심 의제로 떠오르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전쟁과 기후변화, 보호무역 강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상황에서 식량은 더 이상 단순한 농산물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안보를 좌우하는 전략 자산으로 자리 잡고 있다.

 

유엔의 이번 경고는 일부 국가의 기아 문제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 전반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신호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제사회가 식량안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향후 세계 경제와 물가, 그리고 각국의 안보 전략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