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도 폭염에 원전도 멈췄다.. 유럽 덮친 ‘기후경제 쇼크’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초고온 현상 확산.. 학교 폐쇄·전력망 비상
기후위기, 환경 문제 넘어 에너지·산업·물가 흔드는 경제안보 변수로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유럽이 기록적인 폭염에 휩싸이면서 기후변화가 단순한 환경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제와 에너지 안보를 위협하는 현실적 위험으로 떠오르고 있다.

 

23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The Guardian)에 따르면 프랑스 남부 일부 지역의 기온은 40도를 넘어섰고, 스페인 남부에서는 최고 44도 안팎의 폭염이 관측됐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도 광범위한 고온 경보를 발령했으며, 영국에서는 예년보다 높은 기온이 이어지자 보건당국이 노인과 어린이 등 취약계층 보호 조치에 나섰다.

 

가디언은 프랑스 정부가 폭염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 수천 개 학교의 휴교 또는 단축 수업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실내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정상적인 수업 진행이 어려워졌고, 지방자치단체들은 냉방 시설을 갖춘 공공건물을 임시 대피소로 개방하고 있다.

 

이번 폭염은 단순한 계절성 재난을 넘어 사회 기반시설과 경제 시스템 전반을 흔들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 유럽 현지 언론들은 전력 수요 급증과 원자력발전소 운영 차질 가능성이 동시에 제기되면서 각국 정부가 에너지 수급 대책 마련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유럽에서 반복되는 폭염이 기후위기의 새로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한다. 과거에는 폭염이 건강 문제나 농업 피해를 유발하는 자연재해 정도로 인식됐다면 이제는 전력 공급과 산업 생산, 노동시장, 물가를 동시에 흔드는 구조적 위협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유럽은 최근 수년 동안 연이어 기록적인 폭염을 경험하고 있다. 2003년 유럽을 강타한 폭염으로 약 7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 이후 각국은 대응 체계를 강화했지만 극단적 고온 현상은 오히려 빈번해지고 있다. 2022년에도 유럽 전역에서 수만 명의 폭염 관련 초과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으며 이후에도 최고 기온 기록이 잇따라 경신되고 있다.

 

기후과학자들은 과거 수십 년에 한 번 나타날 정도의 이상고온이 이제는 몇 년 단위로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유럽연합(EU) 산하 기후관측기관인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서비스(C3S)는 유럽이 지구 평균보다 빠른 속도로 온난화가 진행되는 지역 가운데 하나라고 분석해왔다.

 

무엇보다 이번 폭염이 심각한 이유는 유럽 사회가 아직 고온 환경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미국이나 한국처럼 냉방 시설이 보편화된 국가와 달리 유럽의 상당수 주택과 공공시설은 전통적으로 냉방 설비 없이 운영돼 왔다. 특히 영국과 독일, 프랑스 등은 비교적 온화한 기후를 전제로 도시와 주거 환경이 설계돼 폭염 발생 시 사회적 충격이 더 크게 나타난다.

 

◆ 폭염에 냉각수 온도 상승.. 원전마저 흔들린다
이번 폭염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유럽 에너지 시스템의 핵심인 원자력발전소까지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전체 전력 생산의 약 70%를 원전에 의존하는 세계 최대 원전 국가 중 하나다. 원전은 탄소 배출이 적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는 장점 때문에 유럽의 에너지 안보를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로 평가받아 왔다.

 

뮨제는 이런 폭염이 원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원자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막대한 양의 냉각수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강이나 바다의 물을 끌어와 냉각에 활용하는데 폭염이 심해질 경우 수온 자체가 상승하면서 냉각 효율이 떨어진다. 여기에 냉각에 사용된 물을 다시 강으로 방류할 경우 수생 생태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어 규제 문제도 발생한다.

 

FT는 최근 유럽의 고온 현상이 원전 운영의 새로운 리스크로 부상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과거에도 폭염으로 인해 일부 원전이 출력 조정에 들어간 사례가 있었으며, 독일과 스위스 역시 강 수온 상승 때문에 발전량을 줄인 적이 있다.

 

문제는 폭염이 전력 수요가 가장 많은 시기에 발생한다는 점이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냉방 수요는 급증한다. 가정과 기업, 상업시설이 동시에 에어컨 사용을 늘리면서 전력 소비량이 크게 증가한다. 그러나 정작 전기를 생산해야 할 원전은 냉각 문제로 발전량을 줄여야 할 수 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기후변화가 에너지 시스템을 공격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평가한다.

 

과거 에너지 안보의 위협은 전쟁이나 국제 분쟁, 원유 공급 차질 같은 외부 변수로 인식됐다. 하지만 이제는 기후 자체가 에너지 인프라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폭염은 원전뿐 아니라 다른 발전원에도 영향을 미친다. 수력발전은 가뭄으로 인해 발전량이 감소할 수 있으며, 태양광발전 역시 일정 수준 이상의 고온에서는 효율이 떨어질 수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를 추진 중인 유럽 입장에서도 폭염은 예상보다 복잡한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

 

◆ 노동·식량·물가까지.. ‘경제위기’로 번지는 기후변화
폭염의 영향은 에너지 부문에 그치지 않는다. 산업 현장과 노동시장에도 직접적인 충격을 주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폭염이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대표적인 요인이라고 경고해왔다. 특히 건설업과 농업, 물류업, 제조업 등 야외 활동이나 고온 환경 노출이 많은 산업은 피해가 크다.

 

일례로 기온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작업 효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열사병 위험도 증가한다. 결국 기업들은 근무 시간을 조정하거나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한낮 야외 노동 제한 조치가 시행되고 있으며 건설 현장의 작업 중단 사례도 늘고 있다.

 

이런 식의 생산성 저하는 결국 경제 성장 둔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투자은행들과 국제기구들은 앞으로 폭염이 유럽 경제의 새로운 구조적 위험요인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폭염으로 인한 피해는 농업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유럽 남부 지역은 이미 수년째 가뭄과 폭염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밀과 옥수수, 올리브, 포도 등 주요 농산물 생산량이 감소하면서 식품 가격 상승 압력이 커지고 있다.

 

기후변화가 물가 상승을 부추긴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최근 보고서에서 기후변화가 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농산물 생산 감소와 전력 비용 상승, 물류 차질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 소비자물가가 지속적으로 압박받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관광산업도 예외가 아니다. 여름철 관광객 유치로 경제를 떠받쳐온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스는 최근 지나친 폭염이 오히려 관광객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직면해 있다. 일부 유명 관광지에서는 한낮 야외 관람을 제한하거나 운영 시간을 조정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유럽 폭염이 단순한 기상 이변이 아니라 미래 경제의 방향을 보여주는 경고라고 평가한다.

 

기후변화는 더 이상 북극의 빙하가 녹거나 해수면이 상승하는 환경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전력 공급과 산업 생산, 식량 가격, 노동시장, 국가 재정에 이르기까지 경제 전반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한때 기후위기는 미래 세대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 여겨졌다. 그러나 올여름 유럽이 겪고 있는 현실은 다르다. 뜨거워진 공기는 학교 문을 닫게 하고, 원전의 출력을 낮추며,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물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유럽을 덮친 44도의 폭염은 기후변화가 더 이상 미래의 위험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경제·에너지 위기임을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장면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