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AI 열풍 타고 일본 제조업 활력.. 반도체 주문 러시 이어져

서비스업 둔화에도 반도체·전자부품이 내수 부진 방어
국산화 시동 건 日 소부장, 韓 HBM과 맞물려 글로벌 벨트 구축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주도하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인프라 투자 열풍이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제조사를 넘어 일본의 첨단 제조업 생태계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고성능 AI 서버용 반도체와 핵심 전자부품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그동안 장기 침체와 내수 부진에 시달리던 일본 제조업계가 단기 호황을 넘어 구조적 성장 궤도에 진입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15일(현지시간) 로이터 통신이 발표한 일본 기업 경기실사지수인 ‘로이터 단칸(Reuters Tankan)’ 7월 조사에 따르면 일본 제조업 경기심리지수(DI)는 플러스(+13)를 기록하며 전월의 견조한 흐름을 그대로 이어갔다. 이 지수는 경기가 이전보다 개선됐다고 답한 기업의 비율에서 악화됐다고 답한 기업의 비율을 뺀 수치로 플러스 영역을 확고히 지키고 있다는 것은 일본 제조업 현장의 온기가 지속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속되는 글로벌 고금리 기조와 러·일,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 속에서도 일본 제조업이 강력한 방어력을 보여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 세계적인 AI 인프라 확충이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 밀려드는 주문에 방긋, 日 소부장 글로벌 AI 밸류체인 핵심 장악
이번 로이터 단칸 조사에 참여한 일본의 주요 제조업체들은 약속이나 한 듯 경기 호조의 핵심 동력으로 ‘AI 반도체 및 고부가 전자부품 수요의 상시적 급증’을 꼽았다.

 

익명을 요구한 일본의 한 정밀 전자기기 제조업체 관계자는 수주 현황을 묻는 질문에 "AI 서버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세가 현장으로 다이렉트하게 전달되고 있다"며 "현재 몰려드는 주문량이 공장의 실제 생산 능력(Capa)을 상회하고 있어 라인을 풀가동해도 납기를 맞추기 버거울 정도"라고 현장의 뜨거운 분위기를 전했다.

 

또 다른 IT 핵심 부품 제조사 임원 역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인프라 투자가 계속되는 한 고마진 부품의 수주 랠리는 최소 수년간 이어질 것"이라고 낙관했다. 시장 전문가들이 특히 주목하는 지점은 이번 AI 특수가 단순히 완성품 칩을 만드는 제조사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이 전통적인 강점을 가진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공급망 전반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AI 서버에 탑재되는 초고성능 메모리와 연산 장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초미세 공정용 화학 소재와 고도의 패키징(반도체 조립·포장) 기술이 필수적이다. 이로 인해 반도체의 원자재가 되는 실리콘 웨이퍼, 포토레지스트(감광액), 반도체용 기체(가스)를 생산하는 일본의 정밀 화학 기업들과 글로벌 시장을 과점하고 있는 노광·세정·검사 장비 업체들이 도미노식 낙수효과를 누리고 있다.

 

이는 국내 반도체 산업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주도하며 글로벌 AI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이들이 사용하는 핵심 소재와 초정밀 장비의 상당 부분은 일본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의 최첨단 메모리 제조 기술력과 일본의 독보적인 소부장 인프라가 맞물린 한·일 반도체 벨트가 엔비디아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탄탄한 후방 기지 역할을 하며 동반 랠리를 펼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 엔저 명암 심화, 내수 서비스업은 비용 폭탄에 둔화
그러나 수출 제조업이 누리는 축제 분위기와 달리 일본의 내수 경제를 떠받치는 서비스업(비제조업) 전선에는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다. 7월 로이터 단칸 비제조업 경기심리지수는 전월(+32) 대비 7포인트나 급락한 +25를 기록하며 뚜렷한 둔화세를 보였다. 제조업 지수가 견고하게 버틴 것과 비교하면 일본 내수 경기의 기초체력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비제조업계가 체감하는 가장 큰 위협 요인은 ‘역대급 엔화 약세(엔저)에 따른 수입 물가 폭탄’과 ‘인건비 상승’이다. 장기화된 엔저 기조로 인해 해외에서 수입해 오는 에너지, 원자재, 식품 가격이 천정부지로 솟구쳤고 이는 자영업자와 유통·물류·서비스 기업들의 마진율을 극도로 압박하고 있다.

 

여기에 심각한 구인난으로 인한 인건비 지출 가중,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불안으로 인한 유가 변동성까지 더해지며 비용 부담이 임계점에 달했다는 지적이다. 결국 물가 상승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실질임금으로 인해 일본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기 시작하면서 제조업은 엔저를 발판 삼아 질주하는 반면 서비스업은 고스란히 그 비용 독배를 마시는 경기 양극화 현상이 일본 경제의 새로운 아킬레스건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당분간 일본 제조업의 독주와 이에 따른 우상향 흐름이 꺾이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민간 기업들의 압도적인 기술 경쟁력에 더해 일본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 중인 반도체 부활 외교 및 전폭적 보조금 정책이 강력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수조 원에 달하는 파격적인 보조금을 지원하며 대만 TSMC의 구마모토 제1·2공장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데 이어, 소니·도요타 등 자국 대기업들이 연합한 반도체 드림팀 ‘라피더스(Rapidus)’를 통해 최첨단 2나노미터 공정의 자국 내 양산을 목전에 두고 있다. 이러한 국가 주도의 대규모 인프라 및 설비 투자는 건설, 기계, 정밀 부품 등 후방 산업 전반에 마르지 않는 낙수효과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중이다.

 

도쿄의 한 거시경제 분석가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 간의 AI 패권 경쟁과 데이터센터 증설 트렌드는 단기적 유행이 아닌 거대한 산업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며 "글로벌 소부장 공급망의 핵심축을 쥐고 있는 일본 제조업은 내수 경기 둔화 우려 속에서도 독자적인 호황 국면을 상당 기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