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이상현 편집위원]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785년 전인 1231년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고려가 부처님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나가자는 취지로 온 힘을 다해 만들었다고 한다.
천문학적인 인간 노동시간이 투입됐고, 가로 70cm, 세로 50cm, 평균 두께 약 4cm인 대장경판 8만1352개 분량의 목재를 마련하는데 수백톤의 나무가 사용됐다.
기자는 해인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 노동력과 목재, 시간이면 무기와 군사훈련을 최정예화 해서, 몽골을 무찌르지 않았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살을 만들었어도 어마어마한 양을 만들었을 거란 생각도 했다. 사실 기자와 비슷하게 ‘고려는 힘이 아닌 주술로 몽골에 대적하려 했다’는 식의 비슷한 주장을 한 일본 학자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튀르키예를 지나 러시아, 동유럽까지 진출한 몽골군의 기동력과 잔인함, 무자비함은 정평이 나 있다. 적절히 맞서거나 대비한 나라는 사실상 전혀 없었다는 게 정설이다. 러시아 언론인 동료는 “러시아는 유럽지향적 외교 때문에 무너졌다고 본다. 처음부터 유럽을 몽골로부터 보호하지 말았어야 했다. 러시아 지식인 중에는 싸우지 않고 러시아 영토를 통해서 바로 유럽으로 보냈으면 지금 세계가 달랐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귀띔했다. 아무튼 지난 일을 두고 ‘왜 준비를 못했나? 그럴 여유가 있다면 전쟁에 대비 했어야지!’라는 식의 접근은 부질없고, 또 부질없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영토를 빼앗는 전쟁에서는 지휘통신시설(C4I)과 여자, 기타 적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우선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상례다. 더 먼 과거일수록 피침입 지역 종교시설이 우선 순위 목록의 상위에 올라 있다. 몽골군도 그랬다. 침입 이듬해인 1232년 당시 대구 부인사에 소장돼 있던 초조대장경판(初雕大藏經板)을, 1238년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을 각각 불태워 없앴다.
이번엔 법력으로 전쟁・인공지능・기후변화 위협 제거
인류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인 전쟁은 인류 문화유산의 파괴 행위이자 새로운 문화 유산을 만들어 내는 중요한 산파다. 몽골 침입 4년 뒤인 1236년(고려 고종23년) 경상남도 합천 가야산 해인사에서 1251년까지 16년에 걸쳐 팔만대장경이 제작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몽골군은 저항하는 도시·지역에 대해 ‘총력전(total war)’ 방식을 자주 사용했다. 항복하지 않으면 주민을 대량 학살하고, 성벽·건물·관개 시설·도서관·사원 등을 파괴해 재건을 어렵게 만들었다. 저항을 응징하고 사기를 꺾기 위함이다.
몽골군은 1258년 중앙아시아·서아시아 도시 메르브와 니샤푸르, 헤라트, 바그다드 등에서 도시 전체와 도서관(바그다드 ‘지혜의 집’ 등을 포함), 모스크, 병원을 불태우고 부쉈다. 튀르키예에서 이라크에 이르는 티그리스 강이 잉크로 검게 물들었다는 전설도 기록에 남아 있다.
초조대장경이 불탄 지 794년, 팔만대장경이 완성된 지 775년만인 2026년 7월24일 기자와 만난 해인사 주지 혜일 스님은 팔만대장경을 다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혜일 스님은 790년 전 불가항력적 위협이 몽골이었다면, 지금 시대의 불가항력적 재앙은 ♟전쟁 ♟인공지능(AI) ♟기후변화 등 3가지라고 했다. 790년 전에는 몽골의 고려 침략에 맞서려고 불경을 목판에 새겼다면, 2026년에는 고려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구제하려 또 한번 팔만대장경을 만들기에 착수하겠다는 설명이다.
기자가 스님께 물었다. “기후변화로부터 인류를 구제한다는 명분과 이를 위해 나무로 만든 대장경을 만드는 방식이 상충되지 않습니까? 나무 대신 전 세계 심각한 해양 쓰레기로 나무와 똑같은 재질의 합성수지를 만들어 그걸로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게 세계지도자들의 동참을 얻기에 더 낫지 않겠습니까?”
스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과거 나무심기로 숲이 울창해졌으나, 현재는 과밀화된 나무가 되레 숲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라고 답했다. 간벌(솎아베기)로 산림 밀도를 조절, 산불을 예방하고 탄소 흡수량도 높여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실제 해인사는 국립산림과학원과 삼림개량을 위해 팔만대장경의 주요 재목인 산 벚나무를 베는 대신 다른 나무를 새로 심는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한다. 또 이런 국가적 계획에 따라 전국 사찰 보유 산림에서 목재를 조달할 채비를 갖췄다고 한다. 한 펄프회사가 간벌 때 벤 산벚나무를 대량 기증하기로 했다고도 귀띔했다.
팔만대장경을 한 번 더 만들겠다는 계획은 20년이 남짓 걸리고 국가예산도 많이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다. 혜일 스님은 “2023년 만난 세르조 마타렐라(Sergio Mattarella) 이탈리아 대통령이 힘을 보태기로 했다”고 전했다.
범종・법고・목어・운판은 육해공+인지전…민심 모두 모아야 난제 극복
혜일 주지스님의 설명을 듣고도 아쉬움이 남는다. 스님은 “팔만대장경이 세계기록유산과 세계문화유산 두 부문에서 각각 지정된 것은 유래 없는 일”이라며 “유네스코 등재는 팔만대장경이 전쟁을 멈췄다는 실증, 물증이지 않겠는가?”라고 되물었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이 몽골의 침입 전쟁을 멈췄다고 인정하더라도, 오늘날 스님이 지적한 3가지 과제에 직면한 인류, 가깝게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들은 당시와 너무나 달라진 환경, 달라진 위협에 직면해 있다.
우선 고려 땅은 몽골 침입 790여년 만에 아예 두 동강이 났다. 누구는 ‘통일 돼야 할 하나의 나라’라고 하고, 다른 이들은 ‘아예 두 개의 나라로 살자’고 한다.
수백명의 초등학생이 뛰놀던 가야산자락 해인초등학교도 7년 전 문을 닫았다. 달라진 전쟁개념과 고도화 된 무기체계 때문에, 새 팔만대장경의 시대정신은 기마병 중심의 몽골군이 닿기 힘든 섬이나 험령준곡의 두메산골에 굳이 머물 필요도 없다.
혜일 주지스님을 뵙기 직전, 해인사 팔만대장경연구원장 경암스님과 차담을 나눴다. 차담 자리에서 “북한 보현사에 인경본(대장경 원본으로 인쇄한 책자) 전질이 보관돼 있다고 들었는데, 인쇄물 상태 등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을 포함해 인경본 책자가 전달된 나라들과 교류 및 소통을 하십니까”라고 여쭸다. 경암 스님은 “정부도 못하는데, 우리가 어찌…”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북한을 제외하고는 정기적으로 소통을 하고 있는데, 스님은 “호주에서는 우리가 보내준 인경본 책자를 냉동고에 넣었다는 소식을 전해와 아연실색 했다”고 덧붙였다.
기자에게 두 가지의 기대가 있었다. 먼저 팔만대장경을 통해 사바세계에 투사된 부처님의 법력이 국경과 국가권력을 넘어 효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했다. 또 그것을 위해 또 한 번 팔만대장경의 신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스님들의 신념과 열정에 모든 대한민국 중생들이 힘과 지혜를 모으기를 기대했다.
고려시대 때보다 숙련인력이 턱 없이 부족해 7년 전 폐교가 된 해인 초등학교에서 구슬땀 흘리며 목판제조와 인쇄술을 연마하는 스님들만의 노고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전쟁과 인공지능, 기후변화의 위협을 제거하려면 온 국민, 온 인류의 열망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유네스코 세계기념의 해로 지정된 2026년은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이기도 하다. 김구 선생은 유럽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한편 만주 벌판에서 무장투쟁으로 제국주의 일본과 맞섰다.
‘높은 문화의 힘'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자 했던 선생의 뜻이 새로 만들어질 팔만대장경에 투사되길 바란다. 부디 강하고 자애로운 부처님의 뜻으로 전쟁을 다스려 한반도 평화와 세계평화를 이루고, 인간이 인공지능과 기후변화를 통제하고 규율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해인사 한복판 마당에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이렇게 4가지의 법구(法具)가 모여 있다. 범종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에게 불법의 울림을 전하고, 법고는 땅 위의 동물을 구제하기 위해 두드린다.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진 목어는 물속의 중생들, 운판은 하늘을 나는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각각 울린다. 육해공 전투에 인지전(Cognitive Warfare)을 합쳐 놓은 형국이다.
고려시대 영토를 기준으로 한반도에 사는 남북 7700만여 동포들이 동시에 새로운 팔만대장경의 비전에 공감하며, 4가지 법구들을 일제히 두드린다면 어떨까. 혜일 스님의 난제(전쟁・AI・기후변화)도 너끈히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이상현 <엔트로피>편집위원
러시아 <스푸트니크> 한국특파원, 서울외신기자클럽(SFCC) 회원, 아시아기자협회(AJA) 회원, 지구촌 팩트체크기구 GFCN 회원. 고정 칼럼 [엔트로피 網] 등을 집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