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정부가 2038년까지 천연가스 저장시설을 대폭 확충하고 국가 차원의 비축체계를 강화하기로 했다. 장기적으로 천연가스 소비는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저장탱크와 공급망은 오히려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탈탄소 흐름 속에서도 액화천연가스(LNG)를 줄여야 할 화석연료가 아니라 국가 에너지 안보를 뒷받침하는 전략 자산으로 관리하겠다는 정책 기조가 이번 계획에 담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 천연가스 수요 감소 전망에도 저장시설·비축은 확대키로
산업통상자원부는 27일 '제16차 장기 천연가스 수급계획(2026~2038)'을 확정·공고했다. 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2038년까지 LNG 저장용량을 현재 671만톤에서 최대 887만톤으로 확대하고 천연가스 주배관도 564㎞ 추가 건설하기로 했다. 민간 저장기지 확충과 당진 제5기지 건설도 병행한다. 이는 단순한 인프라 확충을 넘어 공공과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 비축체계로 전환하는 의미를 가진다.
눈에 띄는 대목은 수요 전망과 투자 방향이 엇갈린다는 점이다. 정부는 기준 시나리오에서 국내 천연가스 총수요가 올해 4591만톤에서 2038년 4100만톤으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발전용 수요는 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에 따라 연평균 4.5%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반면 도시가스 수요는 산업용을 중심으로 증가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감소세를 피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즉, 덜 쓰게 될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이 저장할 자원으로 관리하는 역설적인 구조가 형성되는 셈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저장시설과 배관망을 확대하는 이유는 수요보다 공급 불확실성을 더 큰 위험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중동 정세 불안, 호르무즈 해협 리스크 등은 글로벌 LNG 시장의 가장 큰 변수로 꼽힌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으로 전력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할 전원으로 LNG의 역할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결국 이번 계획의 초점은 얼마나 사용할 것인가보다 언제든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에 맞춰졌다.
정부는 기존 공공 중심의 LNG 비축체계에 직수입 기업 등 민간 참여를 확대하고, 공공과 민간의 도입·재고 정보를 통합 관리하는 '천연가스 수급관리 통합 시스템'을 구축하기로 했다. AI를 활용해 위기 상황을 예측하고 시뮬레이션하는 기능도 도입한다.
도입 전략도 바뀐다. 특정 국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공급선을 다변화하고, 가격 변동성이 큰 현물시장 대신 중장기 계약 비중을 확대하기로 했다. 유가와 미국 가스가격 등 다양한 가격지수를 혼합하는 방식으로 가격 리스크도 분산한다는 방침이다.
정부는 또 발전용 수요의 불확실성을 반영한 '수급관리수요'를 별도로 산정했다. 기준 수요는 감소하지만 송전망 구축 지연이나 신규 발전설비 준공 일정, 수소발전 확대 등의 변수를 고려하면 실제 관리해야 할 LNG 수요는 2038년에도 현재 수준인 4767만톤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정부는 이 수치를 장기 도입계약과 인프라 투자 기준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이는 단순한 예측치가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도 전력 공급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보험적 수요라는 의미를 갖는다.
국제적으로도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LNG 저장능력을 확대하는 움직임은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후쿠시마 이후 원전 의존도를 줄이며 LNG 비축을 강화했고, 유럽은 러시아산 가스 공급 차질을 겪으며 저장시설 확충에 나섰다.
한국의 이번 계획은 이러한 흐름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데이터센터·반도체 등 신산업 전력수요를 고려한 점에서 산업 전략적 성격이 짙다는 평가다. 특히 AI 시대의 전력 수요라는 새로운 변수는 과거 어느 장기 수급계획에서도 본격적으로 반영되지 않았던 요소다.
다만 대규모 인프라 확충에는 막대한 재정적 부담이 뒤따른다. 저장기지와 배관망 건설 비용이 수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공공·민간 분담 구조와 요금 반영 여부가 향후 논란이 될 수 있다.
또한 LNG는 상대적으로 청정한 화석연료로 불리지만 결국 탄소 배출원이라는 점에서 탄소중립 목표와의 긴장 관계도 존재한다. 정부는 “탄소중립 기조를 수정한 것이 아니라 에너지 안보를 우선순위로 조정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환경단체들은 “화석연료 인프라 확대가 장기적으로 탈탄소 전환을 지연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문가들은 “안보와 환경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지가 정책의 핵심 과제”라고 지적한다.
이번 계획은 과거 장기 수급계획과 비교해도 성격이 달라졌다. 제15차 계획까지는 ‘수요 관리’와 ‘감축 목표’가 중심이었다면 제16차 계획은 위기 대응과 안보 확보에 방점이 찍혔다. LNG를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전략 자산으로 규정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정책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결국 제16차 장기 천연가스 수급계획은 가스를 얼마나 줄일 것인가보다 필요할 때 끊기지 않게 확보할 수 있는가에 무게를 둔 첫 장기 계획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에너지 안보와 탄소중립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정부가 어떤 균형을 유지할지가 향후 정책의 성패를 가를 관건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