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글로벌 시장에서 탄소 감축을 향한 요구가 전방위로 거세지면서 대한민국 수출 제조업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쟁력이 사상 최대의 시험대에 올랐다. 글로벌 RE100 선언 기업이 빠르게 늘어남에 따라 이제 시장에서의 기업 평가와 실질적 수출 경쟁력은 단순한 선언 및 가입 여부를 넘어 실제로 활용 가능한 친환경 전기를 얼마나 확보했는가, 라는 실행력의 격차에서 갈리고 있다.
그러나 현장 기업들이 체감하는 진짜 애로는 탄소 감축에 대한 의지 부족이나 투자 미온이 아니다. 정작 기업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재생에너지를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가격에 조달할 수 있는 국내 전력망과 시장 인프라가 따라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본질적인 문제다. 한국 제조업의 사활이 걸린 재생에너지 확보전이 개별 기업의 외로운 싸움을 넘어 국가 차원의 전력 생태계 경쟁으로 직면한 이유다.
◆ "기업 의지 아닌 구조적 한계" 규제 변화에 가로막힌 현장
에너지경제연구원(이하 애경연)은 최근 발표한 「국제 산업부문 재생에너지 전환 지원정책 및 규제동향 분석: RE100 대응과 이행지원 중심으로」(기본연구 25-26) 보고서를 통해 국내 기업들의 RE100 이행 지연이 개별 기업의 소극적 태도가 아닌 국내 전력 시장이 안고 있는 구조적 장애물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에경연의 분석에 따르면 국내 산업부문은 국가 전체 에너지 소비의 약 60%를 차지하고 이 중 제조업 비중이 약 96%에 달할 정도로 전력 수요가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글로벌 RE100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38%가 한국을 재생에너지 조달이 가장 어려운 국가 중 하나로 지목할 만큼 국내 공급 여건은 매우 척박한 실정이다.
실제 국내 K-RE100 조달 규모 자체는 매년 늘어나고 있지만 조달의 질적 구조를 들여다보면 심각한 난관이 드러난다. 실질적인 신규 재생에너지 설비 투자 유인 효과(추가성)가 적은 녹색프리미엄 비중이 전체의 80.5%에 달하는 반면 기업과 발전사업자가 직접 장기 계약을 맺는 전력구매계약(PPA)이나 자가발전 활용은 높은 망 이용료와 제도적 경직성에 막혀 미미한 수준에 그치고 있다.
여기에 재생에너지 자원은 호남과 해안가 등 서남권에 집중된 반면 전력을 소비할 주요 산단은 수도권과 충청권에 몰려 있어 송전망 병목 현상과 출력제어가 상시화되는 문제도 기업의 원가 부담을 한층 가중시킨다. 주요 선진국이 세액공제, 보조금, 장기 저리융자 등 입체적 지원책을 펼치는 것과 달리 국내 지원책이 융자 중심에 머물러 있는 점도 구조적 한계를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이처럼 국내 조달 여건은 한계에 직면해 있지만 해외발 ESG 규제 패러다임은 기업들의 숨통을 더욱 죄어오고 있다. 유럽연합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철강·알루미늄 등을 시작으로 본격화되는 가운데 글로벌 ESG 공시 기준은 기업의 직접 배출(Scope 1·2)을 넘어 협력사 및 공급망 전체의 배출량을 아우르는 'Scope 3'까지 빠르게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빅테크와 완성차 업체들은 이미 국내 부품·소재 협력사들에게 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계약의 필수 조건으로 내걸고 있어 이제 친환경 전력 확보는 단순히 좋은 이미지를 얻는 차원을 넘어 수출길을 여는 최우선 생존 과제가 됐다.
◆ 반도체·배터리 등 주력 산업 직격탄…전력 인프라 확보전으로 재편
이러한 전력 수급의 격차는 대한민국 수출의 핵심 축인 반도체와 배터리 등 글로벌 공급망의 최전선에 선 기업들에게 즉각적인 실질적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24시간 멈춤 없이 안정적인 고품질 전력이 공급되어야 하는 반도체 산업과 원재료 채굴부터 제조, 폐기에 이르는 전 주기 탄소발자국을 입증해야 하는 배터리 산업 특성상 애플·엔비디아 등 글로벌 고객사의 무탄소 전력 요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대기업들이 해외 사업장에서는 빠른 속도로 재생에너지 전환을 이루어내고 있음에도 대규모 생산 라인이 집약된 국내 사업장에서는 조달 물량 부족과 높은 단가라는 이중고를 겪는 디커플링(격차)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국내 공장에서 생산된 첨단 제품이 단지 화석연료 기반 전력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해외 시장에서 탄소 페널티를 받거나 공급망에서 배제될 위기에 처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향후 글로벌 제조업의 패권이 과거의 공장 입지 공식을 넘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전력 인프라 확보전으로 전면 재편될 것으로 전망한다. 최근 국가적 화두로 떠오른 호남권 반도체 산단 및 AI 데이터센터 유치 논의 역시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 산업단지 유치의 3대 핵심 요소였던 △부지 △용수 △인력에 더해 이제는 '탄소 중립 전력을 즉각적이고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전력망을 갖추었는가'가 기업의 최우선 입지 결정 요건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산업부문 재생에너지 전환을 개별 기업의 ESG 숙제가 아닌 국가 차원의 산업경쟁력 핵심 요소로 재정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이를 위해 ▲신규 투자를 유인하는 장기 PPA 중심의 시장 정착 ▲계약·정산·계통 접속의 불확실성 완화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속성 인증체계(EAC) 정비 ▲기업 규모와 업종별 특성을 고려한 차등형 금융·세제 지원체계 마련이 시급하다고 제시했다.
에너지업계 역시 정부 차원의 무탄소 전력망 인프라 확충과 송전망 건설, PPA 제도 개혁이 신속히 이뤄지지 않는다면 한국 제조업의 글로벌 공급망 입지 유지는 점차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