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공급망 움켜쥔 중국, 기술 있지만 착공 못 하는 한국

무탄소 전력 확보 경쟁의 새로운 격전지로 떠오른 해상풍력
두산·LS·조선업계 등 공급망 갖췄지만 인허가·계통 부족에 발목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의 확산과 첨단 제조시설 증설로 글로벌 전력 확보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해상풍력이 다시 국가적 핵심 카드로 떠오르고 있다. 좁은 국토 면적 탓에 대규모 태양광 부지 확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한국에서 바다에 띄우는 해상풍력은 수 기가와트(GW)급 무탄소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유력한 대안으로 꼽힌다.

 

특히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 등 한국의 수출 주력 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으로부터 거센 RE100(사용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AI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메가와트급 전력 수요까지 폭발하자 해상풍력의 필요성은 한층 더 절박해졌다.

 

정부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추가 추진하고 있지만 긴 건설 기간과 부지 선정 마찰로 단기적인 전력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기저전력 역할을 할 대규모 무탄소 에너지원으로서 해상풍력은 단순한 친환경 전환을 넘어 한국 첨단 산업의 글로벌 생존권이 걸린 핵심 산업 경쟁력으로 직결되고 있다.

 

◆ 통째로 찍어내는 중국 vs 기술 쥐고 발 묶인 한국
문제는 글로벌 시장의 주도권 경쟁 판도가 급격히 기울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세계 시장을 빠르게 잠식 중인 중국의 독주 배경은 단순한 가격 경쟁력이나 물량 투입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은 초대형 메가와트(MW)급 풍력 터빈의 국산화부터 하부구조물, 초고압 해저케이블, 전용 설치선박(WTIV)에 이르기까지 발전소 하나를 통째로 건설하는 데 필요한 산업 생태계 전체를 자국 영토 안에 완벽히 완성했다.

 

여기에 더해 중국은 지방정부 주도의 개발 승인 체계와 대규모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사업 추진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이 같은 정부 주도의 속도전은 단가 절감과 대규모 시공 경험 축적이라는 강력한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고 계획 수립부터 상업 운전까지의 주기를 극단적으로 단축하며 글로벌 공급망을 빠르게 삼키는 동력이 됐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도 정작 안마당 시장이 열리지 않아 현장에 나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두산에너빌리티가 대형 해상풍력 터빈 기술을 국산화하며 국내 풍력 생태계를 이끌고 있고, SK이노베이션 E&S는 약 5GW 규모의 대규모 재생에너지 파이프라인을 바탕으로 사업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해상풍력의 핏줄이라 불리는 초고압 해저케이블 분야에서는 LS전선이 글로벌 톱티어 수주 실적을 이어가고 있으며 HD현대와 한화오션 등 조선업계 역시 고난도 해상풍력 설치선 및 부유식 구조물 건조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자랑한다. 이처럼 터빈과 케이블, 시공선박에 이르는 탄탄한 공급망을 가졌음에도 국내 프로젝트의 최종 착공이 차일피일 미뤄지면서 기업들은 보유한 기술과 자본을 집행해 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 기술보다 어려운 착공의 시간.. 인허가·송전망·비용에 막힌 해상풍력
이 같은 극명한 차이를 만드는 근본 원인은 국내의 난공불락과 같은 인허가 장벽이다. 현재 한국에서 해상풍력 사업을 추진하려는 민간 개발사는 산업통상자원부, 환경부, 해양수산부 등 10여 개 부처에 걸린 수십여개 관련 법률을 개별적으로 밟아야 한다. 이에 따라 발전사업 허가부터 환경영향평가, 해역이용 협의, 그리고 주민 및 어민 동의까지 마치려면 평균 5~6년 이상의 세월이 허비된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익명을 요구한 해상풍력 개발사 관계자는 "우리가 중국 기업보다 기술이나 시공 능력이 떨어져서 뒤처지는 게 아니다"라며 "사업 허가 하나를 받기 위해 수년 동안 부처를 전전하고 어민 설득에 피가 말리는 동안 중국은 이미 발전기를 돌리고 있다. 기업들이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착공까지 걸리는 시간에 맞아 죽는 실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설상가상으로 어렵게 인허가를 받아 단지를 조성하더라도 전력을 소비처로 보낼 송전망(계통)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주요 발전 지역인 해안가에서 최대 소비처인 수도권까지 전력을 끌어올 고압직류송전(HVDC)망 구축이 지역 이기주의와 예산 문제로 지연되면서 발전소를 지어놓고도 전기를 내보내지 못해 셔터를 내려야 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다.

 

여기에 글로벌 고금리와 원자재 가격 상승, 터빈 가격 폭등이라는 외생 변수까지 겹치면서 수년씩 늘어진 인허가 기간 동안 발생하는 막대한 이자 비용과 인플레이션 부담은 온전히 기업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다.

 

결국 글로벌 해상풍력 시장의 주도권 경쟁은 더 이상 단순히 '누가 더 좋은 발전기를 만드느냐'의 기술 경쟁이 아니다. 누가 더 빨리 행정 허가를 내주고 공급망을 차질 없이 연결하며 생산된 전력을 산업 현장까지 지체 없이 끌어오느냐의 속도전이다. 중국이 거대한 내수 시장과 정부 주도의 패스트트랙으로 시장을 선점하는 동안 한국 기업들은 뛰어난 기술력을 가두어 둔 채 규제와 소통 부재라는 장벽을 우회해야 하는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해상풍력 특별법(정부가 인허가를 일괄 지원하는 신속 처리 제도)'의 조속한 통과와 국가 차원의 전력망 적기 확충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한국 기업들은 안마당 시장마저 중국산 공급망에 넘겨주고 글로벌 RE100 경쟁에서도 퇴출당할 수 있다는 현장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