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중국 전기차가 바꾼 에너지 공식, 석유시장까지 흔든다

BYD 등 중국 업체 글로벌 확장에 석유시장 지각변동
완성차 넘어 정유업계 생존 전략 다시 짜야 할 판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전기차 전환의 파장이 자동차 산업의 경계를 넘어 글로벌 석유 시장 판도까지 흔들고 있다.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이자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을 중심으로 전기차 확산 속도가 빨라지면서 수송용 석유 수요 감소라는 새로운 변수가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맹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중국 전기차의 질주는 이제 단순한 판매량 경쟁을 넘어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구조적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발 전동화가 수송용 석유 수요 감소를 현실화하면서 시장 방어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완성차 업계뿐만 아니라 정유업계 역시 친환경 연료와 석유화학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 승용차 넘어 상용차까지 침투한 탈석유화…한국 산업계 '이중 타격' 위기
로이터는 8월 4일(현지시간) 중국 전기차 수출 확대가 단순한 기후 변화 대책을 넘어 실제 글로벌 휘발유 수급과 가격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과거에는 전기차 확산이 10~20년 뒤의 장기적인 석유 수요 감축 요인으로 평가받았으나 중국을 중심으로 한 보급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으면서 수송용 석유 소비 구조가 가파르게 뒤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거대한 에너지 지형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곳이 바로 중국이다. 세계 최대의 자동차 시장이자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 내에서 전기차 비중이 커질수록 글로벌 석유 시장이 받는 타격은 즉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글로벌 전기차 전망 2026(Global EV Outlook 2026)’ 보고서를 통해 현행 정책이 유지될 경우 2030년 전기차가 대체하는 석유량이 하루 약 500만 배럴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IEA는 이 가운데 중국 내 전기차가 대체한 석유 수요만 2025년 기준 하루 약 100만 배럴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 같은 탈석유화 흐름은 현장 지표에서 구체적인 수치로 증명되고 있다. 중국 내 신에너지차 침투율이 급격히 치솟으면서 기존 석유 유통망은 직격탄을 맞았다. 일례로 중국에서는 이미 주유소 사업 모델 자체에 대한 재검토가 시작되고 있다. 전기차 충전 인프라 확대가 기존 석유 유통망의 역할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과거 승용차 중심이었던 전동화 흐름이 물류용 대형 트럭과 버스 등 상용차 분야로 확대되면서 LNG 및 전기 트럭 보급 증가로 정유사들의 핵심 수익원인 디젤 수요마저 동시에 꺾이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중국발 쇼크가 해외 신흥 시장으로 전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로이터는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내수 성장 둔화와 공급 과잉 압박을 해소하기 위해 해외 시장 공략을 사활을 걸고 추진 중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미국과 유럽연합의 관세 장벽을 피해 동남아시아, 남미 등 신흥 시장으로 판매 무대를 넓히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이들 시장을 새로운 성장 무대로 삼을 수 있는 배경에는 가격 경쟁력과 공급망 장악력이 있다. 배터리 원자재 조달부터 완성차 제조까지 이어지는 수직계열화를 바탕으로 원가를 낮춘 BYD 등 중국 브랜드들은 신흥국 전기차 시장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공세는 한국 산업계에 완성차와 정유라는 두 핵심 축 모두에 압박을 가하는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 현대차·기아는 동남아 등 핵심 신흥 시장에서 저가 중국산 EV의 공세에 맞서 시장 점유율을 방어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동시에 동남아는 한국 정유사들의 최대 석유제품 수출국 중 하나인 만큼 동남아 도로의 전동화가 빨라질수록 국내 정유업계의 수출 길목이 좁아지고 정제마진이 하락하는 이중고를 겪게 되는 셈이다.

 

◆ 휘발유 시대 이후를 준비하는 정유사.. SAF·화학사업으로 이동
중국 전기차 확산으로 석유 수요 구조가 바뀌는 가운데 한국 정유업계는 사업 모델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핵심은 기존 연료 생산 중심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항공유(SAF)와 석유화학 등 새로운 성장 분야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것이다.

 

과거 정유사의 경쟁력은 원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이를 휘발유·경유 등 석유제품으로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전기차 확산으로 운송용 연료 시장의 성장성이 둔화하면서 앞으로는 같은 원유에서 얼마나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느냐가 새로운 경쟁력이 되고 있다. 지속가능항공유(SAF)에 가장 먼저 투자가 쏠리는 이유다.

승용차와 버스, 일부 상용차는 배터리 기반 전동화가 가능하지만 장거리 항공 운송은 무게와 운항 거리 문제로 전면적인 전기 전환이 쉽지 않다. 이에 따라 글로벌 항공업계에서는 기존 항공유를 대체할 친환경 연료 확보가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정유사들도 이 시장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보고 있다. 기존 정유 설비와 생산 경험을 활용하면서도 폐식용유 등 바이오 원료를 활용한 친환경 연료 생산 능력을 확보해 새로운 수익원을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단순히 탄소 감축 요구에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전기차 확대 이후에도 남아 있을 대규모 연료 시장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다.

 

석유화학으로의 사업 전환도 속도를 내고 있다. O2C(Oil to Chemical)는 원유를 정제해 휘발유와 경유를 만드는 대신 처음부터 석유화학 원료 생산 비중을 높이는 방식이다. 자동차 연료로 쓰이는 석유 수요가 줄더라도 플라스틱, 첨단 소재, 산업용 원료 등 석유화학 분야의 수요는 일정 부분 유지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정유업계가 주목하는 것은 석유 소비 감소가 곧바로 석유 가치 하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으로 경쟁의 기준은 얼마나 많은 연료를 판매하느냐가 아니라 같은 원유에서 얼마나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느냐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전환이 중국 EV 확산이라는 구조 변화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유사는 기존 연료 시장에서 발생하는 수익 감소를 새로운 사업이 얼마나 빠르게 메울 수 있을지 시험대에 올랐다. 완성차 업계 역시 전기차 가격 경쟁력과 배터리 공급망 확보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결국 중국 전기차의 질주는 자동차 기업 간 경쟁을 넘어 에너지 산업 전체의 재편을 촉발하는 신호탄이 되고 있다. 전기차 확산은 석유 소비 구조를 바꾸고, 배터리 공급망을 재편하며, 정유사의 생존 전략까지 다시 쓰게 만들고 있다. 앞으로 글로벌 산업 경쟁력은 더 이상 차량 생산 능력만이 아니라 변화하는 에너지 수요에 얼마나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