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그간 폭염은 남의 일이라 치부해왔던 유럽이 사상 유례없는 폭염에 시달리면서 각종 불편을 호소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올해 유럽을 덮친 기록적인 폭염이 전력수요뿐 아니라 발전소의 공급능력까지 동시에 흔들면서 기후재해의 위험성이 얼마나 심각한지 새삼 체감하는 중이다. 실제로 하루가 다르게 기온이 치솟으면서 냉방용 전력수요는 늘어나는데 가뭄으로 강 수위가 낮아지고 강물 온도까지 오르면서 원전과 화력발전소가 냉각에 필요한 물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기를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순간 발전소의 출력이 오히려 떨어지는 이른바 전력의 역설이다. 기후변화가 전력수요를 끌어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발전설비의 가동 조건까지 흔들고 있는 것. 문제는 이 같은 상황을 유럽만의 일로 치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도 올여름 폭염이 이어지면서 전력수요가 빠르게 치솟았다. 정부는 당초 올여름 최대전력수요를 94.1~98.8GW로 전망했고, 지난 10일 전력거래소는 이번 주 최대수요를 96.7GW로 예상했다. 98.8GW가 현실화하면 2024년 기록한 역대 최대 전력수요 97.1GW를 넘어선다.
지금까지 전력수급은 수요가 얼마나 늘어날지 예측하고 이에 맞춰 발전설비를 얼마나 확보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극한기후 속에서도 확보한 발전설비가 실제로 제 성능을 낼 수 있는지까지 살펴야 한다. 유럽에서 벌어지는 일은 기후변화가 전력수급의 조건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 수요 폭증한 순간 냉각수 부족.. 유럽 곳곳 발전 차질
올여름 유럽 중·동부 지역에서는 40도를 넘는 폭염이 이어졌다. 오스트리아·슬로바키아·헝가리 등에서는 40도를 웃도는 기온이 관측됐고, 폭염과 강수량 부족이 겹치면서 다뉴브강의 수위도 기록적으로 낮아졌다. 가디언은 10일 다뉴브강의 수위 저하가 냉각수를 필요로 하는 원전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문제가 된 것은 강물을 냉각수로 사용하는 발전소들이다. 원전과 화력발전소는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을 식히기 위해 냉각수가 필요하다. 강 수위가 낮아져 취수 여건이 나빠지거나 수온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발전량을 줄이거나 일부 설비의 가동을 제한해야 할 수 있다.
헝가리 팍스 원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로이터에 따르면 다뉴브강 수위가 기록적으로 낮아지면서 팍스 원전은 한때 8개 터빈 가운데 1개만 가동해 설비용량의 약 10% 수준으로 운영됐다. 이후 강 수위가 19cm 상승하면서 8월 10일 두 번째 터빈을 다시 가동하기 시작했다. 팍스 원전은 헝가리 전력의 거의 절반을 공급하는 핵심 발전원이다.
루마니아의 체르나보다 원전에서는 상황이 더 긴박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다뉴브강 수위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원자로 2기 가운데 1기가 이미 가동을 멈췄고, 가동 중인 나머지 원자로의 냉각수를 확보하기 위해 당국이 강의 암반을 폭파하고 강바닥을 준설하는 긴급조치에 나섰다. 물길을 확보하기 위해 바지선을 이용해 임시 둑을 만드는 방안도 동원됐다.
체르나보다 원전의 원자로 1기 가동 중단은 루마니아 전력공급의 약 10%에 영향을 미쳤다. 수력발전 역시 가뭄의 영향을 받으면서 전력공급 여건이 악화됐고, 루마니아 정부는 8월 한 달간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같은 사례에서 주목할 점은 발전소 자체가 고장 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료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발전설비는 정상적으로 갖춰져 있지만 발전에 필요한 냉각 조건이 악화되면서 설비가 가진 용량만큼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전력수급에서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폭염과 발전량 감소가 동시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폭염이 심해지면 에어컨 등 냉방기기 사용이 늘면서 전력수요가 증가한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가뭄과 수온 상승으로 일부 발전소의 출력이 떨어지면 공급 여력은 줄어든다. 수요는 올라가는데 공급능력은 떨어지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이런 현상은 특정 발전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강물 온도가 높아지면서 강물을 냉각수로 사용하는 원전의 출력이 제한되거나 원자로가 일시적으로 정지한 사례가 발생했다. 지난 7월에는 가론강 수온 상승으로 골페시 원전의 한 원자로가 일시 정지했고, 다른 원전에서도 출력 제한이 예상됐다.
국제에너지기구(IEA)도 폭염과 가뭄이 발전소의 냉각수 확보를 어렵게 해 원자력과 화력발전의 출력을 낮추거나 가동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해왔다. IEA에 따르면 프랑스 촤즈 원전은 2020년 심각한 가뭄으로 약 두 달간 가동이 중단됐고, 2022년에도 여러 발전소가 냉각수 부족으로 출력을 줄였다.
결국 발전소의 안정성을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발전용량과 예상 이용률뿐 아니라 극한기후가 발생했을 때 냉각수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지, 수온 상승에도 발전을 지속할 수 있는지, 장기간 가뭄이 이어질 경우 출력 저하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까지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 한국도 최대수요 경신 전망…기후변화발 전력 리스크 현실화
이같은 일은 단지 유럽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유럽의 사례가 그대로 한국에서 재현된다고 볼 수는 없다. 국내 발전소는 입지와 냉각 방식에서 유럽의 강변 발전소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원전 상당수는 해수를 냉각수로 사용하기 때문에 다뉴브강과 같은 하천의 수위 저하가 곧바로 국내 원전의 발전 차질로 이어지는 구조는 아니다.
그럼에도 기후변화에 따른 전력수급 위험에서 한국이 자유롭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한국 역시 폭염이 심해질수록 냉방수요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부는 올여름 최대전력수요를 94.1~98.8GW로 전망하면서 장기간 폭염이 이어지고 태풍 등으로 구름이 유입돼 태양광 발전량이 줄어드는 경우 최대수요가 98.8GW까지 높아질 수 있다고 봤다. 이는 2024년 기록한 역대 최대 전력수요 97.1GW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실제 전력수요는 이미 높은 수준까지 올라왔다. 전력거래소는 8월 10일 이번 주 최대 전력수요를 96.7GW로 전망했다. 지난주에는 전력 총수요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전설비의 명목상 용량과 실제 공급능력 사이의 차이다.
예를 들어 1GW 규모의 발전설비를 확보했다고 하더라도 극한기후로 출력이 제한된다면 전력계통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전력은 1GW보다 적어진다. 전력수요가 가장 높은 순간 이런 공급능력 저하가 발생하면 전력계통이 감당해야 할 부담은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력수급계획에서도 단순히 미래 최대전력수요를 예측하고 이에 맞춰 발전설비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폭염으로 전력수요가 급증하는 동시에 특정 발전원의 출력이 감소할 가능성을 함께 계산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뭄으로 수력발전량이 줄어드는 상황, 냉각수 온도 상승으로 원전과 화력발전의 출력이 제한되는 상황, 기상조건 변화로 재생에너지 발전량이 예상보다 낮아지는 상황까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
국제에너지기구 역시 기후변화가 심해질수록 고온과 극한기후가 전력의 안정적 공급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폭염이 넓은 지역에 걸쳐 발생하면 인접 지역에서 부족한 전력을 끌어오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폭염이 동시에 전력수요를 끌어올리고 발전설비의 공급능력을 떨어뜨리는 '동시 충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전력수급을 전망할 때도 기후 변수의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폭염으로 수요가 급증하는 상황에서 가뭄이나 수온 상승으로 일부 발전소의 출력까지 떨어질 경우 공급 여력이 예상보다 줄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발전설비의 규모뿐 아니라 극한기후에서 실제 발전량이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는지까지 살펴야 한다.
여기에 송전망과 에너지저장장치, 수요관리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발전설비 일부가 기후조건 때문에 제 역할을 하지 못하더라도 다른 발전원이나 저장장치, 수요관리로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전력계통의 유연성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벌어진 일은 기후변화가 발전소를 직접 파괴하지 않더라도 전력 생산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폭염은 전력수요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가뭄과 수온 상승을 통해 발전소의 공급능력을 떨어뜨릴 수 있음을 충분히 인지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 역시 이 문제를 남의 일로만 바라보기 어렵다. 다만 유럽의 사례가 국내에서 똑같이 나타난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국내 발전소의 냉각 방식과 수자원 여건을 기준으로 어떤 기후 위험에 노출돼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전력안보의 기준도 달라지고 있다. 발전소를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에 그치지 않고 전력이 가장 절실한 순간에도 실제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느냐를 봐야 한다. 기후변화가 전력수요와 발전능력을 동시에 흔들 수 있는 시대, 전력수급계획에도 기후 스트레스를 계산하는 일이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