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재영 기자] 한국 전력정책의 무게중심이 생산량 확대에서 생산과 소비의 지역적 불균형 해소로 이동하고 있다. 발전소가 밀집한 지역과 실제 전력을 많이 쓰는 지역이 서로 다른 구조적 문제를 요금제를 통해 바로잡겠다는 취지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 4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지역별 전력 수급 여건을 반영한 산업용 전기요금 체계 개편안을 밝혔다. 개편안에 따르면 전국을 4개 권역으로 나누고 전력자립도와 송전 비용·전력망 여건·국가균형발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역별 요금을 차등 적용한다. 상대적으로 부담 여력이 있고 전력 수요에 민감한 산업용 전기에 우선 적용될 방침이다.
다만 이번 개편안이 최종 확정된 것은 아니다. 정부는 이달 중 공청회와 업계 의견 수렴 등을 거쳐 세부안을 확정한다는 방침이다. 연합뉴스 보도 등에 따르면 당국이 검토 중인 구체적인 안에는 영·호남 등 남부권의 산업용 전기요금을 최대 kWh당 18원, 강원·충청 등 중부권은 최대 15원, 인천·경기 북부 등 수도권 북부는 최대 10원 인하하는 방안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전력 소비가 집중된 서울과 경기 남부 등 수도권 남부는 인하 혜택 대상에서 제외되거나 폭이 제한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산업용 전기요금이 kWh당 180원 안팎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남부권의 최대 인하 폭은 10% 안팎이다. 단순한 지방 지원책으로 보기에는 차이가 적지 않은 수준이다.
◆ 정부가 가격으로 균형 맞추려는 이유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가 나온 배경에는 한국 전력시장의 오래된 문제가 있다. 발전과 소비가 공간적으로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원전과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는 비수도권에 상대적으로 많이 자리 잡고 있지만 전력 소비는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수도권에는 반도체와 배터리 등 첨단산업 투자가 이어지고 있고 데이터센터 같은 대규모 전력 소비시설도 늘고 있다.
이 구조에서는 지방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야 한다. 따라서 발전설비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송전선로와 변전소 등 전력망을 함께 확충해야 한다는 의미다. 문제는 송전망을 짓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경제적 비용뿐 아니라 노선 선정 과정에서 주민 수용성을 확보해야 하는 문제도 있다. 발전소를 짓는 것보다 송전망 건설이 더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다.
여기에 수도권의 전력 수요를 더욱 크게 만들 대형 프로젝트가 계속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반도체다. 로이터는 지난 10일, 한국 정부의 반도체 메가프로젝트를 보도하면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2041년까지 14.7GW의 전력을 공급하는 계획을 주요 인프라 과제로 소개했다.
반도체 산업의 투자가 늘어날수록 전력 수요도 함께 증가한다는 의미다. 결국 수도권에 산업을 계속 집적시키면서 필요한 전력을 지방에서 끌어오는 방식에는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정부가 지역별 전기요금 차등제를 꺼내든 것도 이 때문이다.
전력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지역의 산업용 전기요금을 낮춰 기업이 그곳에 투자할 유인을 만드는 것이다. 전력 생산지에 산업을 가까이 배치하면 수도권으로 보내야 하는 전력량을 줄일 수 있고 장거리 송전망을 새로 건설해야 하는 부담도 일부 덜 수 있다. 기후부가 지역별 요금제를 설계하면서 송전선로 이용 비용과 지역별 전력자립도, 전력망 여건 등을 고려하겠다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존 전력정책이 단순히 소비지로 전력을 수송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번 정책은 차등 요금제를 통해 전력 다소비 기업의 지방 이전을 유도하는 구조다. 하지만 현장의 시선은 신중하다. 단순히 전기요금 몇 원이 낮아진다고 해서 기업들이 공장이나 데이터센터를 지방으로 옮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 산업 입지·전력망까지 바꿔야.. 싼 전기만으로 산업 입지 바뀔지는 의문
기업 입장에서 전기요금은 무시할 수 없는 비용이다. 철강·석유화학·배터리처럼 전력 다소비 업종일수록 요금 차이가 생산비에 직격탄이 된다. 그러나 기업의 투자 결정이 단지 전기료 하나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반도체와 자동차 등 첨단 산업일수록 핵심 인력과 부품 생태계, 용수, 물류 인프라가 입지를 좌우한다. 결국 지역별 차등 요금제가 실제 기업 이전으로 이어지려면 요금 인하와 함께 지방의 정주 여건과 생산 인프라 구축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더 큰 관건은 전력의 가격보다 안정성이다. 기업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싼 전기가 아니라 생산 차질을 일으키지 않는 확실한 전기다. 지방의 요금을 낮춰도 전력망이 단지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면 정책 효과는 반감된다. 결국 차등 요금제는 지방의 전력망을 확충하는 송전망 정책과 한 묶음으로 움직여야 한다.
나아가 이는 소비자를 넘어 전력 도매시장과 발전사의 수익 구조까지 건드리는 복잡한 방정식이다. 전력이 풍부한 지방 발전사는 제값을 못 받고, 수도권 발전사는 가치가 뛰는 등 이해관계 충돌이 불가피하다. 주민, 기업, 발전사업자 모두의 셈법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수도권 집중과 송전망 건설 지연을 감안하면, 전력 생산지로 기업을 유인하는 가격 신호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이 정책의 성패는 kWh당 18원 인하라는 숫자 자체에 있지 않다. 인력과 생태계가 수도권에 쏠린 상황에서 이 정도 가격 차이가 기업의 실제 투자 경로를 바꿀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성공한다면 전력을 억지로 수도권으로 끌어올리던 구조에서 벗어나 전력이 있는 곳에 산업을 배치하는 새로운 국토·에너지 지도를 그리게 된다.
한국 전력정책은 이제 필요한 곳에 전기를 보내는 시대를 지나 전력이 있는 곳으로 산업을 끌어오는 시대로 진입했다. 이번 개편안이 단순한 선심성 보조금에 그칠지, 산업 지도를 바꿀 신호탄이 될지는 가격 너머의 종합적인 실행력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