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인공지능과 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대규모 산업 프로젝트가 몰고 올 전력 수요가 기존 전망을 크게 뒤바꿀 것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2029년까지 14.7GW, 2035년에는 24.7GW 이상의 신규 전력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AI 데이터센터에서만 18.4GW의 추가 수요가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발전설비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렵다며 전원 구성부터 송전망, 저장장치, 전력시장까지 전력시스템 전반을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 폭증하는 전력수요와 수급 불균형 어떻게 맞출까
현재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잠정안의 2040년 전력수요는 657.6~694.1TWh, 최대전력은 132~138GW로 전망돼 있다. 하지만 호남 반도체 6.3GW와 AI 데이터센터 18.4GW 등 현재 추진되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추가 부하 24.7GW가 기존 설비계획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에 따라 사실상 수립 마무리 단계에 있던 12차 전기본을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발전설비 증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며 전원 구성부터 송전망, 저장장치, 전력시장에 이르기까지 전력시스템 전반의 근본적인 재설계가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단순히 전력 수요의 절대량이 늘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전력을 공급할 위치와 방식에 있다. 주요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수요를 보면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는 최대 6~8GW, SK하이닉스 이천은 2~3GW, 삼성·SK의 주요 프로젝트를 합치면 15~16GW 수준으로 추정된다. 광주광역시의 현재 평균 전력수요가 1.5~2GW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수요가 도시 전체 수요를 크게 웃도는 셈이다.
이와 함께 전력의 지역적 불균형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전력수요가 수도권에 집중되는 반면 재생에너지 발전은 호남·영남 등 비수도권에 집중되는 구조다. 수도권은 국토 면적의 약 12%에 불과하지만 전력수요의 41%가 집중돼 있는 반면 재생에너지 발전은 호남 36.6%, 영남 23.7% 등으로 지역별 편차가 크다. 발전지역에서 생산된 전력을 수요지역으로 보내기 위한 송전망 확충이 늦어지면 계통제약과 출력제어가 불가피해진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AI 시대의 전력수요 변화와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전원믹스, 전력망, 저장기술, 수소산업의 역할을 논의하기 위해 지난 13일 ‘AI 시대 전력시스템 대전환과 수소의 역할’ 공동 정책포럼이 열렸다. 이날 포럼에 참석한 에너지·전력·수소 분야 전문가들은 전력 시스템의 전면적 재설계 필요성에 입을 모았다.
박은덕 한국에너지학회 회장은 AI·반도체·데이터센터 등 이른바 메가프로젝트의 확산으로 우리나라 전력수요가 장기간의 성장기와 최근 정체기를 지나 다시 성장 국면으로 들어설 가능성에 주목했다. 박 회장은 AI와 재생에너지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발전·송배전·부하·계통운영·전력시장 모두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진단했다.
미국은 대규모 송전망을 확충하는 동시에 데이터센터 인근에 가스발전이나 연료전지 등을 설치하는 온사이트 전력망을 활용하고 있고, 중국 역시 대규모 송전망을 확충하며 AI 산업을 뒷받침하는 전력 인프라 확보에 나서고 있다는 비교도 제시됐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AI와 데이터센터 전력수요가 급증하면서 전력망 접속 지연이 평균 7.2년에 이르고 있다. 단기적으로 온사이트 가스발전·연료전지나 발전소 인근 데이터센터 건설, PPA 등이 활용되고 장기적으로 대규모 송전망을 확충하는 방식이다.
전문가들은 AI 시대 전력수요를 재생에너지 확대 하나로 해결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고 봤다. 박은덕 회장은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같은 대규모 수요에는 안정적인 전력공급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원전과 재생에너지, 송전망 확충, 스마트팩토리형 전력망, ESS, 수소 등을 결합하는 통합 에너지시스템을 제시했다.
기선 유지를 위한 유연성 전원으로서 LNG의 역할도 강조된다. LNG 복합발전은 1시간 이내에 출력을 조절할 수 있어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하고, 피크부하 대응과 계통 안정화에 탁월하다는 평가다. 특히 반도체 클러스터 인근에 직접 배치할 경우 24시간 끊김 없는 전력 공급과 전압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태의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안보정책연구실장은 한발 더 나아가 현실적이고 균형 잡힌 전원 믹스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이 실장의 분석에 따르면 연간 270TWh에 달하는 신규 발전량을 이용률 15% 수준인 재생에너지만으로 충당하려면 무려 205.8GW 규모의 설비가 필요하며, 이에 따른 저장·백업·계통 보강 비용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에 따라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재생에너지 단독으로 감당하려는 기존 접근법은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이 실장은 원전은 첨단산업의 기저·무탄소 상시전원으로, 재생에너지와 ESS는 일반 부하 중심으로, LNG는 이행기의 유연성·보험 전원으로 각각 명확한 역할을 분담하는 입체적 전력 수급 전략으로의 전환을 강조했다.
◆ 장주기 저장·탈탄소 핵심 수소.. 시장 제도 전환 함께 이뤄져야
재생에너지를 확대할수록 발전량 자체뿐 아니라 저장 문제도 커진다. 이관영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단장은 태양광 설비용량을 200GW까지 확대할 경우 설치면적이 약 1,320~2,400㎢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단순히 발전설비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재생에너지 확대가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관영 단장은 저장시간에 따라 기술의 역할을 나눠야 한다고 봤다.
단기·중기 저장에는 배터리 등이 적합하지만 수일에서 수주, 수개월에 이르는 장주기 저장에는 수소가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확대의 경제성을 확보하려면 각각의 저장기술을 저장시간과 규모에 맞춰 최적으로 조합해야 한다는 논리다.
수소의 역할은 발전 부문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의 최종에너지 소비에서 산업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61%로 영국이나 미국 캘리포니아 등에 비해 크게 높다. 특히 산업 에너지의 82.1%가 석유·석탄·가스 등 직접 화석연료에 의존하고 있어 재생전력을 확대하는 것만으로 산업부문의 탄소배출을 직접 줄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철강의 수소환원제철, 석유화학의 납사 대체와 원료 전환, 시멘트 소성로 등은 단순 전기화로 해결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꼽힌다. 철강에서는 수소가 환원제로 필요하고, 석유화학과 시멘트 역시 고온공정과 화학적 원료 수요 때문에 수소 등 다른 에너지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이종민 한전 전력연구원 에너지환경연구소장은 수소를 특정 발전기술의 연료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재생에너지 확대와 탄소중립, 전력계통의 유연성을 연결하는 에너지 캐리어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만으로 수소시장을 만들 수는 없다는 게 이 소장의 판단이다.
수소혼소 발전의 경우 연소기 교체와 실증기술이 확보되더라도 경제적인 수소 공급과 저장·운송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으면 실제 발전사업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암모니아 발전 역시 연료가격과 공급망, 탄소집약도, 발전단가를 함께 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초기 시장에서는 차액계약 등으로 연료비와 시장가격의 불확실성을 낮추고, 빠른 출력조정이나 예비력, 장주기 저장 등 계통에 제공하는 가치에도 보상이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김은환 한국전력거래소 입찰제도팀장은 전력시장 자체의 변화를 주문했다.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에 대응하는 동시에 AI로 대규모 전력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만큼, 시장에 진입하는 무탄소 전원과 전력수요 모두 계통의 유연성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래소는 이미 BESS 중앙계약시장과 수소입찰시장 등을 도입했고, 재생에너지 입찰제와 실시간·보조서비스 시장 등의 확대도 추진하고 있다.
이태의 에너지경제연구원 실장은 논의를 한 단계 더 좁혔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의 목록이 아니라 어떤 기술을 어떤 순서로, 어떤 가격신호 아래 도입할 것인지에 대한 경제적 설계라는 것이다.
에너지안보 측면에서도 수소의 역할이 강조됐다. 이 실장은 2024년 우리나라의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93.4%에 달하고 에너지 수입액이 1613억달러에 이른다는 점을 들어, 국내 수전해 기반 수소 생산이 탄소중립 수단을 넘어 에너지 자급도를 높일 수 있는 수단이라고 평가했다. 연료전지와 수전해를 국내 실증시장과 연계해 새로운 수출산업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도 내놨다.
신승규 현대자동차 부사장은 새만금을 사례로 재생에너지-수전해-수소 저장-무탄소 발전을 한 지역에 묶는 에너지 지산지소 모델을 제시했다. 새만금에는 2029년까지 AI 데이터센터, 200MW 규모 수전해 플랜트, GW급 태양광 등을 구축하고, 수전해와 수소 저장을 결합해 장주기 수소에너지저장시스템(HESS)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이다.
결국 다가오는 AI·반도체 시대의 24.7GW 신규 전력수요에 대응하려면 단순한 발전량 확대 이상의 과제가 남는다. 원전과 재생에너지, LNG 등 발전원별 역할을 재정립하고, 수요 집중 지역에 송전망과 분산형 전력망을 동시에 구축해야 한다. 아울러 재생에너지의 변동성을 보완할 ESS와 수소 기반 자원을 확충하고 수소가 전력계통의 실질적 유연성 자원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전력시장 제도를 과감히 개편하는 국가 차원의 통합 전력시스템 설계가 시급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