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이상현 편집위원]
미국과 유럽의 소위 주류 매체들이 간단히 확인만 했어도 거짓이 입증될 가짜 뉴스를 버젓이 내놓고 있다.
국제뉴스는 당연히 확인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국 언론들은 이런 말도 안되는 가짜뉴스를 열심히 번역해 보도, 한국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유린하고 있다.
미국 신문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18일(현지시간)치 보도에서 “러시아인들은 크렘린(러시아 대통령의 집무공간)이 전쟁을 위해 예금을 압류할 것을 우려, 은행에서 수십억 달러를 인출하고 있다(Russians pull billions from banks, fearing Kremlin will seize deposits for war)”라는 제목의 기사를 출고 했다.
<WP>는 “러시아인들이 수십억 달러를 인출하고 있어 은행에 유동성 문제를 야기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자금 조달하기 위해 크렘린이 채권을 발행하는 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도 했다.
WP, 반체제 인사 논평, 의회 발언 왜곡해 가짜뉴스 만들어
<WP>는 기사에서 전 러시아중앙은행 직원 출신으로 현재 베를린 소재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센터’ 연구원으로 일하며 독일에 머물고 있는 알렉산드라 프로코펜코의 발언을 인용했다. 프로코펜코는 “러시아 사람들이 러시아 은행 시스템이나 러시아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없다”고 <WP>에 증언했다.
기자가 확인한 바, 프로코펜코는 우크라이나 전쟁 만 1년 뒤인 2023년 2월부터 독일에 머물러 왔다. 2025년 1월17일 러시아 법무부로부터 ‘외국인 대리인’으로 지정됐다. “러시아 공공기관의 결정과 정책에 대한 허위 정보 유포”, “외국인 대리인 자료 제작·배포 참여”, “비우호 조직과의 협력” 등이 지정 이유였다. 주로 러시아가 이적 매체로 지정한 미디어에 출연해 발언한 혐의다. 같은 해 4월8일 모스크바 쿤체프스키 지방법원은 프로코펜코에게 “비바람직한 조직 활동 참여”를 이유로 8000루블(한화 약 13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한국 언론들은 <WP>의 보도를 그대로 베꼈다. 공중파 방송사들은 물론이고 몇몇 ‘진보’로 분류되는 매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글로벌팩트체크네트워크(GFCN)이라는 국제언론인 가짜뉴스 검증단체의 전문가 회원으로 참가하고 있는 기자는 이번 <WP>의 보도를 검증하려고 각방으로 연락했다.
모스크바에 거주하며 1년에 한두번 한국을 다녀가는 한국인 A씨는 “지금 러시아의 예금 금리는 최소 16% 수준인데, 무슨 근거로 러시아인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은행 앞에 길게 줄을 서겠는가”라면서 “기사가 아니라 소설을 쓴 게 아닐까”라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한국에 사는 러시아인 B씨는 기자에게 “한국의 예금금리가 3%도 안 돼 러시아 본사에서 받는 월급도 생활비 빼고 즉시 러시아 부모님께 보낸다”면서 “은행예금 금리 15%를 제쳐두고 돈을 찾아 어디로 간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B씨는 “러시아에서 예금 금리가 높기 때문에 최대한 금리 혜택을 받기 위해 인출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소득이 적은 사람들도 높은 이자를 기대해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에도 가짜 뱅크런 뉴스 보도 짬자미
러시아에서 예금자들이 자신의 예금을 찾기 위해 은행에 일시에 모여드는 ‘뱅크런(Bank Run)’ 현상이 나타났다는 가짜 뉴스는 2022년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지역 특별군사작전 개시 직후 서방언론에서 대거 보도됐다. 당시 한국 언론들도 이런 허위 보도를 그대로 번역해 보도한 바 있다. 이번 WP 보도 역시 똑같은 수순으로 진행됐다.
러시아 경제일간지 <베도모스티> 보도에 따르면, 이번 가짜 뱅크런 기사는 지난 6월 러시아 정가에서 나온 발언을 왜곡해서 만들어졌다. 겐나디 주가노프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부의장(공산당)은 지난 6월20일 제19차 러시아 공산당 대회 2차 회의에서 “은행에는 가계(67조 루블)와 기업(63조 루블)의 예금 총 130조 루블이 있는데, 은행들은 이 돈으로 이익을 취하면서도 국가 발전에 투자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과거 소련 시절 언급됐던 ‘예금 몰수’ 얘기로 와전됐고, 급기야 ‘예금인출 우려’로 이어졌다. 공산당 노선을 포괄적으로 비판해온 아나톨리 아크사코프 하원 금융시장위원회 위원장(정의로운 러시아당 소속)이 나중에 언론 보도를 인용하면서 오해 소지를 낳은 점에 대해 하원 회의에서 공식 사과했다.
<WP>는 이 우발적 사건(happening)을 놓치지 않았고, 에피소드를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 상황으로 묘사했다. 미국과 서방 언론 보도는 아무런 확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단순 번역해 소개해도 된다고 당연하게 여겨온 한국 언론들은 이번에도 <WP>의 보도를 그대로 베꼈다.
유엔 대사가 며칠전 부인한 것도 확인하지 않고 서방언론 베껴
미국 유력 매체의 가짜 뉴스는 사흘을 안 넘기고 곧바로 다른 버전을 출시했다.
러시아가 최대 30만명 또는 50만명의 대규모 군사 동원령을 내릴 것이라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의 23일치(뉴욕 현지시간) 보도였다. 한국 언론은 이 보도 역시 그대로 베껴 번역해 소개했다. 한국의 중앙일간지와 유력 경제지, 유력 인터넷 매체 대부분이 이 뉴스를 다뤘다. 관영 공중파 방송국들도 이 뉴스를 똑같이 다뤘다.
문제는 러시아의 총동원령 소문에 러시아 정부가 수차례에 걸쳐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부인하고 반박했지만, 러시아 매체를 빼고 지구상의 어떤 매체도 러시아의 반론을 실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먼저, 얼추 한달 전인 지난 7월28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전보장이사회 부의장은 “러시아에서 계획된 동원령에 대한 보도는 적의 허위 도발이자 상황을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의도”라고 설명하고 관련 기관과 지역 지도자들에게 이런 심리전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바실리 네벤자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는 지난 21일(뉴욕 시간) 뉴욕 유엔본부에서 유엔 출입 우크라이나 기자로부터 “수만 명의 젊은 러시아인들이 그루지야(조지아) 국경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는 확인 요청을 받고 “현재 러시아가 대규모 동원령이 필요하지 않으며, 계획되거나 예상되지도 않는다”고 분명히 답했다. 이미 그루지야 언론도 관련 소문을 거짓으로 확정 보도한 상태였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대통령궁(크렘린) 대변인은 25일(모스크바 시간) “총동원령 소문은 러시아 상황을 이념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려는 우크라이나 당국이 퍼뜨리는 것”이라며 “모두 언론에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루머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이상현 <엔트로피> 편집위원
러시아 <스푸트니크> 한국특파원, 서울외신기자클럽(SFCC) 회원, 아시아기자협회(AJA) 회원,
지구촌 팩트체크기구 GFCN 회원. 고정 칼럼 [엔트로피 網] 등을 집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