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일본 정부가 원자력발전소를 포함한 대규모 전원과 송전망 투자에 공적금융을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막대한 초기 비용과 긴 투자 회수 기간 때문에 민간만으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운 전력 인프라에 정부가 금융 측면에서 힘을 보태는 방식이다. 원전 재가동은 물론 노후 원전 교체와 전력망 확충까지 추진되면서 일본의 원전 정책이 단순 발전소 운영을 넘어 장기적인 전력 인프라 투자로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수십조 인프라 건설, 민간엔 부담 줄이고 투자 위험 분산
일본의 원전 정책이 2011년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이후 이어져 온 원전 의존도 축소와 단순 재가동 단계를 지나 기존 원전의 장기 활용과 차세대 혁신로로의 교체를 동시 추진하는 가파른 패러다임 전환을 맞이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제7차 에너지기본계획을 통해 안전 확보를 최우선 전제로 원전을 주요 탈탄소 전원으로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방침을 공고히 했다. 나아가 기본 40년에 최대 20년까지 가능한 운전 기간 연장에 그치지 않고 소형모듈원자로나 고온가스로 등 차세대 혁신로 개발·건설은 물론 오랜 침체로 무너진 원자력 산업 부품·소재 및 인력 공급망의 유지를 국가적 핵심 과제로 명시했다.
문제는 사업 추진에 수반되는 막대한 투자 규모와 금융 위험이다. 원전은 초기 건설비만 단지당 수조 원에서 수십조 원에 달하고, 인허가부터 완공까지 10년 이상이 걸리는 대표적인 장기·고위험 사업이다.
여기에 원전이나 대규모 해상풍력 등에서 생산된 전력을 수도권 등 대도시 전력 수요처로 보낼 고압직류송전 등 전력망 확충 비용까지 더해지면 개별 민간 전력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민간 금융기관 역시 긴 회수 기간과 정책 변동에 따른 손실 위험 탓에 선뜻 자금을 대기 어렵다. 일본 정부가 공적금융 제도를 손질하고 나선 배경에는 이러한 대규모 전력 인프라 투자의 본질적인 한계가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 참의원은 지난 7월 17일 원전 등 대규모 전원과 송전망 개발사업에 공적 융자를 투입할 수 있도록 한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가결·성립시켰다.
이 개정법에 따라 경제산업상이 사업의 타당성과 필요성을 승인한 개발계획에 대해 전력광역적운영추진기관이 정부의 재정투융자 자금을 활용해 사업자에게 장기·저리 융자를 제공하거나 채무보증을 제공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민간 전력회사의 재무 부담과 투자 위험을 정부가 금융 측면에서 상당 부분 흡수해 주겠다는 신호를 시장에 보낸 셈이다.
이번 법 개정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대목은 공적 금융 지원의 대상이 단지 원자로를 짓는 사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발전소 건설과 송전망 확충을 하나의 통합 전력 인프라 투자 대상으로 묶어 민간 자금 조달을 유도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발전 설비가 아무리 늘어나도 이를 전달할 전력망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송전 병목 현상을 막기 위해, 발전과 송전을 패키지로 묶어 국가가 투자 위험을 함께 나누는 거시적 인프라 투자 전략을 본격화한 것이다.
◆ 전력 대란 대비.. 2050년까지 원전 최대 14기 교체 추진
일본 정부가 전력 인프라 투자에 다시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에는 전력 수요 변화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AI와 데이터센터, 반도체 등 전력 소비가 큰 산업이 성장하면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확보하는 일이 산업 경쟁력과 직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전 역시 이런 변화 속에서 역할이 커지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면서 원전도 탈탄소 전원의 하나로 최대한 활용한다는 복수 전원 전략을 취하고 있다. 기존 원전의 공급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장기적으로는 노후 원전을 대체할 수 있는 전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올해 6월 기존 원전의 공급력 감소 등을 고려해 2040년대 이후 필요한 원전 교체 규모를 추산했다. 2040년대 약 220만~550만㎾, 2050년대까지 누적으로 약 1270만~1600만㎾ 규모의 공급력 확보가 필요하다는 계산이다. 이를 대형 원전 기준으로 단순 환산하면 2040년대 2~5기, 2050년대까지 누적 11~14기 수준이지만 이는 확정된 건설 계획이 아니라 향후 필요한 교체 규모에 대한 추산치라는 점은 구분해야 한다.
결국 일본 정부가 공적금융을 꺼낸 것은 원전 확대 여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력 수요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발전소와 송전망을 제때 건설하려면 민간에만 투자 위험을 맡기기 어렵다는 판단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에서도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등 대규모 전력 수요가 예상되면서 원전·재생에너지·송전망에 대한 장기 투자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문제는 자금 조달과 위험 분담이다. 발전소 건설과 송전망 확충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 조달, 공공과 민간의 투자 위험 분담 방안은 국내에서도 시급한 정책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다만 일본의 공적금융 제도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일본 역시 이제 제도의 틀을 마련한 단계인 만큼 어떤 사업이 지원 대상이 되고 민간 투자를 얼마나 끌어낼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가 공적금융 카드를 꺼낸 배경에는 원전 자체보다 ‘누가 돈을 댈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전력 수요가 커질수록 발전소와 송전망에 필요한 투자 규모도 커지는 만큼 앞으로 일본의 관심은 원전 확대의 속도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금융 구조가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지에 쏠릴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