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인공지능 데이터센터가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면서 한동안 관심에서 멀어졌던 지열발전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크게 달라지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다. 여기에 차세대 지열 기술인 ‘향상된 지열 시스템(이하 EGS·Enhanced Geothermal Systems)’이 기존 지열발전의 지리적 제약을 넘어설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기대감까지 더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 지열발전이 새로운 기저전원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미국을 중심으로 분위기가 달라지는 모습은 뚜렷하다. 빅테크의 전력 수요가 커지는 가운데 장기계약과 대규모 자본이 지열 프로젝트로 흘러들고, 여기에 석유·가스 업계의 시추기술과 AI 기반 지하 분석까지 결합하고 있어서다.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지열발전의 상용화 가능성을 시험하는 국면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 AI가 찾은 24시간 무탄소 전력에 눈길
지열발전은 지하에 축적된 열을 끌어올려 전력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탈탄소 시대의 해법으로 여겨지는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일조량이나 풍속에 따라 출력이 달라지는 발전원과 달리 지하 열원을 지속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는 게 강점이다. 실제로 미국 에너지부는 지열발전의 설비이용률이 일반적으로 약 90% 수준에 이른다고 설명할 만큼 압도적인 안정성을 자랑한다.
이런 특성은 AI 데이터센터가 빠르게 늘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데이터센터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히 많은 전력이 아니다. 고도화된 AI 연산을 처리하려면 지속적으로 전력을 공급해야 하고, 빅테크들이 탄소 감축 목표를 앞세우면서 전력의 탄소 배출량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안정성과 저탄소라는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전원을 찾는 과정에서 지열이 다시 후보군에 들어온 셈이다.
실제 시장에서도 이런 관심이 계약과 투자로 이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지열 스타트업 패르보 에너지(Fervo Energy)다. 패르보는 지난 5월 기업공개(IPO)를 통해 약 22억달러를 조달했다.
앞서 3월에는 구글과 최대 3GW 규모의 지열발전 개발을 위한 프레임워크 계약을 맺기도 했다. 다만 이 계약을 3GW 규모의 전력구매계약(PPA)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패르보가 일정 기간 지열 프로젝트를 제안할 수 있는 개발 틀을 마련한 것으로 구글이 제안된 모든 사업의 전력을 의무적으로 구매하거나 사업비를 직접 부담하는 구조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빅테크와의 장기적인 협력이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지열발전은 발전소를 짓기 전에 깊은 지하를 탐사하고 시추해야 하는 만큼 초기 투자 부담이 큰 편이다. 안정적인 수요처를 미리 확보할 수 있다면 사업자가 감수해야 할 개발 위험을 낮추고, 투자자 입장에서도 프로젝트의 수익성을 가늠하기 수월해진다.
로이터통신은 지난 6월 구글과 메타 등 빅테크의 장기 전력계약이 지열발전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끌어들이면서 EGS의 비용 절감을 앞당길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기존 지열발전보다 넓은 지역에서 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 EGS에 석유·가스 업계의 시추기술이 접목되면서 지열발전의 사업 방식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데 주목했다.
앞선 사례뿐만 아니다. 관심이 커지면서 시장에 유입되는 자금 역시 늘고 있다. 에너지 컨설팅업체 우드맥킨지가 발표한 2026년 2분기 지열시장 보고서를 보면 차세대 지열 프로젝트 파이프라인은 2GW를 넘어섰다. 올해 2분기에만 21억달러가 투자됐고, 상반기 누적 자금조달 규모는 44억달러에 이른다. 다만 이 수치에는 아직 초기 개발 단계에 머물러 있는 프로젝트도 상당수 포함돼 있어 실제 발전설비 증가와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 땅속 열을 끌어내는 기술.. EGS가 승부처
지열발전이 오랫동안 기대만큼 빠르게 확산하지 못한 데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지하에 열이 있다고 해서 어디서나 발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기존 지열발전은 충분히 뜨거운 지하 열원과 함께 그 열을 지상으로 끌어올릴 물이나 증기 같은 유체까지 자연적으로 갖춘 지역을 찾아야 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이 설명하는 전통적인 지열발전 역시 지하 깊은 곳의 고온 열수와 증기 자원을 활용하는 방식에 기반한다.
결국 발전소를 세울 수 있는 지역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좋은 지열 자원이 확인된 곳이라도 지하 구조가 복잡하거나 시추 비용이 지나치게 높으면 사업성을 확보하기도 어렵다. 지열발전이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넓은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하지 못한 배경에도 이런 입지 제약이 자리한다.
EGS는 바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해 등장한 기술이다. 지하 깊은 곳의 고온 암반까지 시추한 뒤 물이 순환할 수 있는 인공 저류층을 만들어 지열에너지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미국 의회조사국(CRS)에 따르면 EGS는 방향성 시추와 수리자극 등의 기술을 활용해 지하 열원 주변에 유체가 흐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개발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셈이다. 기존 지열발전이 열과 유체가 자연적으로 갖춰진 장소를 찾아가는 방식이었다면 EGS는 열은 존재하지만 발전에 필요한 자연 조건이 부족한 곳까지 개발 범위를 넓히려는 접근에 가깝다.
여기서 석유·가스 산업의 기술력이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다. EGS를 개발하려면 깊은 지하까지 시추하는 것은 물론이고 지질 구조를 정밀하게 파악한 뒤 유체가 흐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 수평·방향성 시추나 유정 완결처럼 석유·가스 산업이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기술을 활용할 여지가 큰 이유다.
국제에너지기구(IEA) 역시 지열 프로젝트에 필요한 투자와 기술, 공급망 상당 부분이 석유·가스 산업과 겹친다고 분석한다. 기존 에너지 업계의 기술과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다면 차세대 지열의 개발 비용을 낮추고 사업 확장 속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패르보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회사는 석유·가스 분야에서 활용해온 수평 시추와 유정 완결 기술을 지열 개발에 적용하면서 시추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올해 7월에는 초기 케이프 스테이션(Cape Station) 유정과 비교해 시추 성과가 개선됐다는 내용도 공개했다.
여기에 AI 기술까지 지하 개발 과정에 들어오고 있다. 미국 태평양북서부국립연구소(이하 PNNL)는 지난 6월 패르보, 엔비디아와 함께 EGS 지하 저류층을 가상공간에 구현하는 ‘EGS-Twin’ 개발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실제 현장에서 확보한 데이터에 물리 기반 모델과 AI 예측을 결합해 지하 저류층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것이 목표다.
지하에서 물이 어떻게 이동하고 열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보다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시추 위치와 저류층 설계를 개선하고 발전 효율을 높이는 데 활용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PNNL은 EGS-Twin을 2029년까지 구축할 계획이다. 지열발전 개발에 필요한 기술이 단순한 시추 장비를 넘어 지질 데이터와 AI를 활용한 지하 모델링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의미다.
◆ 상용화 앞둔 지열, 넘어야 할 산도 많아
다만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서 지열발전의 경제성까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EGS가 상용화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실제 발전소에서 하나씩 검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조사국은 지난 7월 EGS가 비용과 개발 위험을 낮추는 방향으로 진전을 보이고 있지만 대규모 상용화에 필요한 경제성과 장기 운영 안정성은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당시 미국에서 실제 가동 중인 EGS 발전소 역시 한 곳에 그쳤다.
패르보가 추진하는 케이프 스테이션 역시 이제 상용화 가능성을 확인하는 단계다. 1단계는 약 100MW 규모로 올해 4분기 첫 전력 생산을 시작해 연말까지 전체 생산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2·3호기는 2027년 초 초기 발전을 시작할 계획이다.
따라서 현재 시장에서 거론되는 지열발전 관련 숫자를 실제 발전용량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2GW가 넘는 프로젝트 파이프라인이나 수십억달러 규모의 투자금 가운데 상당 부분은 앞으로 사업이 계획대로 진행될 것을 전제로 한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최근 지열발전 시장의 변화를 과거의 관심과 같은 선상에서 볼 수도 없다. AI 데이터센터가 안정적인 무탄소 전력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빅테크가 장기적인 수요처로 등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본이 유입되고 있다. 여기에 석유·가스 산업의 시추기술과 AI 기반 지하 모델링까지 더해지면서 지열발전의 오래된 약점을 보완하려는 시도가 동시에 진행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지열발전 열기를 어떻게 봐야 할까. 당장 새로운 게임체인저가 등장했다고 평가하기보다는 상용화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시험하는 단계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특히 EGS가 그동안 지열발전의 발목을 잡아온 입지와 비용 문제를 실제 상업 프로젝트에서 얼마나 풀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미국에서 진행되는 실험이 성공한다면 지열발전의 개발 대상은 기존의 화산·고온 지열 자원 지역을 넘어 더 넓어질 수 있다. 반대로 시추 비용과 지하 저류층 관리, 안전성, 기대 발전량 확보 같은 문제가 예상보다 크게 남는다면 지금의 투자 열기도 속도를 늦출 가능성이 있다.
시장이 지켜보는 것은 현재 얼마나 많은 지열발전소가 가동되고 있느냐가 아니다. 지하에 존재하는 열을 특정 지역의 자연조건에만 의존하지 않고 필요한 곳에서 경제적으로 끌어내 전기로 바꿀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EGS가 이 오래된 질문에 실제 발전소의 성과로 답할 수 있을까. 그 답이 나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