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인공지능의 전방위적 확산으로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이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전력망 투자비를 둘러싼 논의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새로운 전력 수요를 감당하려면 발전설비와 송전망을 대폭 확충해야 하는데 이 구축 비용을 기존 소비자와 신규 대형 수요자 중 누구에게 얼마나 배분할지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간 전력망은 여러 이용자가 함께 쓰는 공유 인프라였던 만큼 투자비 역시 다수의 전기 소비자가 나눠 부담하는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특정 지역에 대규모 수요가 집중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특정 기업이나 산업단지를 연결하기 위해 별도의 송전선과 변전소를 새로 지을 때조차 기존 소비자가 비용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미국 버지니아주에서는 이런 변화가 실제 전력요금과 규제체계에 발 빠르게 반영되기 시작했다. 한국 역시 대규모 전력수요 기업의 미래 전기요금을 미리 받아 전력망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는 대안을 들고 나왔다. 접근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대규모 신규 수요 폭증에 맞춰 기존의 비용 분담 공식을 재설정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한다.
◆ 대형 수요자 비용 부담 높이는 버지니아주의 정책
버지니아주에서는 데이터센터를 비롯한 대규모 전력수요가 가파르게 늘자 기존 고객과 대형 수요자 사이의 비용 부담 구조를 전면적으로 손질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버지니아주 기업위원회(이하 SCC)는 지난해 11월, 도미니언 에너지(Dominion Energy)의 요금 심사에서 25MW 이상 대형 전력수요자를 위한 별도 요금군인 'GS-5'를 신설했다. 2027년 1월 1일부터 적용되는 이 요금체계는 대상 고객에게 송배전 비용의 최소 85%, 발전 비용의 60%를 부담시키는 기준을 담았다. 대규모 시설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비용이 일반 고객에게 전가되는 현상을 막겠다는 취지다.
이후 논의의 범위는 대형 수요자의 일반적인 요금 부담에서 특정 시설 구축에 필요한 전력망 투자비로 넓어졌다. SCC는 지난 7월 31일 도미니언의 'Rider T-1' 관련 결정을 내리면서 신규 또는 증설 대형 수요자를 전력망에 연결하는 데 별도로 필요한 변전소·송전선 등 직접 연결 시설 비용을 해당 수요자에게 직접 배분하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따라 도미니언은 90일 안에 관련 정책을 제출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GS-5가 대형 수요자의 전반적인 송배전·발전 비용 부담 수준을 조정한 제도라면 이번 결정은 특정 수요를 전력망에 연결하는 과정에서 추가되는 설비 비용의 원인자를 명확히 따져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만 이를 두고 데이터센터가 전력망 확충 비용 전반을 부담하게 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SCC가 이번 결정에서 직접 다룬 대상은 특정 대형 수요를 계통에 연결하기 위해 별도로 필요한 직접 연결 시설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데이터센터 입주에 따라 지역 전체의 송전망을 강화하는 비용까지 해당 사업자에게 일괄 부과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비용 배분 기준의 변화는 일반 가정의 요금 부담 완화로 바로 이어졌다. 버지니아 주지사실 발표에 따르면 도미니언이 당초 제시한 방식에서는 1,000kWh를 사용하는 대표 주거 고객의 월 요금이 2.90달러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으나 비용 배분 방식을 수정하면서 인상 폭은 0.94달러로 낮아졌다. 도미니언이 회수하려던 송전 관련 비용 중 약 9억 9,850만 달러가 이번 비용 배분 논의의 핵심 대상이었다.
이를 가정이 부담하던 비용이 그대로 데이터센터로 넘어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규모 신규 수요로 발생하는 비용을 기존 고객이 어느 정도까지 부담해야 하는지를 다시 따지면서 비용 배분의 기준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비용 부담을 둘러싼 논쟁은 기업과 규제당국의 법적 충돌로도 이어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9월 4일 마이크로소프트(MS)가 버지니아주의 새로운 규정에 이의를 제기하며 버지니아주 대법원에 항소했다고 보도했다. 데이터센터 개발업체에 송전 인프라 건설 비용을 선불로 부담하게 한 점이 주요 쟁점이다.
결국 버지니아에서 논의되는 핵심은 데이터센터에 단순히 더 많은 요금을 매기는 데 있지 않다. 대규모 전력수요 때문에 추가로 필요한 설비를 어디까지 특정 수요와 연결된 비용으로 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비용을 어느 범위까지 해당 수요자에게 배분할 수 있는지가 쟁점이기 때문이다.
특정 데이터센터를 연결하기 위해 새 변전소와 송전선이 필요해졌다면 해당 수요자에게 비용을 부담시키는 논리가 비교적 명확하다. 반면 데이터센터가 들어선 지역의 전반적인 송전망을 강화하는 비용까지 특정 사업자에게 배분할 수 있는지는 별도의 판단이 필요하다. 따라서 버지니아의 변화는 대규모 신규 수요로 발생하는 전력망 비용의 원인을 한층 세분화해 부담 주체를 정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 한국은 미래 전기요금으로 투자 재원 확보 나서
대규모 전력수요에 따른 전력망 투자비 문제는 한국에서도 현실적인 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처럼 대규모 수요가 특정 지역에 집중되는 경우에는 전력을 공급하기 위한 송전선과 변전소를 선제적으로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전력은 지난 3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향후 5년 치 전기요금을 미리 납부하는 방안을 제안하고 협의에 나섰다. 규모는 삼성전자 20조 원, SK하이닉스 5조 원 등 총 25조 원 수준이다. 한전은 이렇게 미리 확보한 전기요금을 용인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전력망 건설에 필요한 초기 재원으로 활용하는 구상을 제시했다.
이는 버지니아에서 논의되는 방식과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버지니아가 특정 대형 수요를 연결하기 위해 추가로 필요한 설비의 비용을 해당 수요자에게 직접 배분하는 방향이라면 한전의 제안은 기업이 앞으로 낼 전기요금을 미리 받아 전력망 투자에 활용하는 재원 조달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25조 원의 전력망 건설비를 부담하기로 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한전 측에 따르면 두 기업의 참여 여부를 비롯해 선납 규모, 이자율, 선납 기간 등 세부 조건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제안이 주목받는 배경에는 대규모 전력수요와 전력망 투자를 따로 떼어놓기 어려운 현실이 있다. 반도체 클러스터에 필요한 전력을 제때 공급하려면 발전설비뿐만 아니라 송전선과 변전소를 적기에 확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선행 투자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실제로 반도체 클러스터의 전력공급설비 비용 분담 역시 별도로 논의되고 있다. 전력 사용 비중에 따라 공공과 민간이 비용을 나누어 부담하는 구조가 검토되고 있으며, 민간 부담분 일부에는 반도체특별법에 따른 재정 지원도 추진되고 있다. 한전의 25조 원 선납 구상은 이러한 비용 분담과는 별개의 재원 조달 방안이다.
따라서 현재 한국에서 나타난 변화는 대형 수요자가 전력망 건설비를 직접 부담하도록 하는 제도라기보다 대규모 전력수요에 맞춰 필요한 투자를 앞당기고 그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방식이 다변화되고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AI 데이터센터의 확산은 이런 논의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짧은 기간 안에 막대한 전력을 특정 지역에서 필요로 할 수 있다. 새로운 시설이 들어설 때 발전설비뿐만 아니라 송전선과 변전소까지 추가로 필요하다면 이에 필요한 투자비를 기존 전기 소비자가 계속 함께 부담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처럼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 하는 제조시설이 늘어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전력수요가 커질수록 필요한 전력망 투자도 커지는 만큼 기존 소비자와 신규 대형 수요자 사이의 비용 분담 문제도 함께 커질 수밖에 없다.
버지니아의 사례가 사용자 부담 원칙이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대규모 신규 전력수요가 기존 비용 배분 방식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수요 증가로 추가된 전력망 비용을 기존 고객과 신규 대형 수요자 사이에서 어떻게 나눌지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를 둬야 할 것이다.
한국 역시 이 문제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 현재는 한전이 미래 전기요금을 미리 받아 전력망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한 수준이지만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 등 대규모 전력수요가 계속 늘어난다면 전력망 확충에 필요한 투자비를 어떤 기준으로 조달하고 배분할지에 대한 논의도 구체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AI가 가져온 전력수요 경쟁은 단순히 발전소를 얼마나 더 지을 것인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대규모 수요를 수용할 전력망을 얼마나 빠르게 확충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투자비를 기존 고객과 신규 대형 수요자 사이에서 어떤 기준으로 나눌지도 전력산업의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