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국내 기업들의 RE100(사용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 이행이 단순 선언을 넘어 장기 전력구매계약(PPA) 중심의 실무 이행 단계로 본격 전환되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양적 확대에도 기업들이 원하는 전력을 원하는 조건과 가격에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는 여전하다.
정부가 최근 PPA 중개플랫폼을 공식 가동하고 망 이용요금 지원에 나선 것도 공급자와 수요자 간 정보 비대칭과 비용 부담을 낮추기 위한 조치다. 결국 국내 RE100 시장의 과제는 재생에너지를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에서 한발 더 나아가 기업이 예측 가능한 비용으로 필요한 전력을 확보할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 데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 기업은 PPA 원하지만 가격이 걸림돌
글로벌 탈탄소 기조가 강화되면서 기업들의 재생에너지 확보는 선택이 아닌 필수 과제가 됐다. 특히 여러 조달 방식 중에서도 기업들이 가장 주목하는 수단은 단연 PPA(전력구매계약)다.
실제로 기업재생에너지재단이 수요·공급기업 192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업들이 희망하는 재생에너지 조달 수단 가운데 PPA가 55.4%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향후 2026년 조달 계획에서는 이 비중이 68.1%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PPA는 발전사업자와 기업이 장기간 전력구매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신규 재생에너지 발전설비 구축과 직접 연계될 경우 온실가스 감축의 핵심 요건인 추가성 측면에서도 강점이 있어 글로벌 공급망의 재생에너지 조달 요구에 대응해야 하는 기업들의 주요 수단으로 꼽힌다.
문제는 기업들이 선호하는 PPA를 실제로 계약하기까지 넘어야 할 비용 장벽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같은 조사에서 수요기업의 56.4%는 자발적 재생에너지 거래시장의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높은 PPA 계약가격’을 꼽았다. 2025년 수요기업이 체감한 태양광 PPA 가격 역시 175~180원/kWh 고단가 구간에 대다수 분포하며 기업들에 상당한 부담을 가중시킨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에너지경제연구원이 인용한 RE100 2024 연례보고서에서도 국내 기업의 조달 어려움이 두드러졌다. 2024년 국내 RE100 가입기업 183개사 가운데 70개사(38.3%)가 재생에너지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다. 미국 7.2%, 중국 10.7%, 일본 21.1%와 비교하면 높은 수준이다.
문제는 발전사업자가 제시하는 PPA 계약가격만이 아니다. 기업이 PPA로 전력을 조달할 경우 발전가격 외에 망 이용요금과 예비력 운영비, 부가정산금 등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한국전력거래소 관계자도 최근 기업의 PPA 도입과 관련해 이 같은 추가 부담을 고려해 실질적인 조달비용을 산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생에너지의 발전량이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만큼 부족한 전력을 보완하기 위한 비용까지 고려해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발전사업자가 제시한 단가만으로 실제 RE100 이행 비용을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다.
◆ 중개플랫폼만으론 풀기 어려운 구조
이처럼 PPA에는 비용과 절차라는 장벽이 있다 보니 기업들은 PPA를 선호하면서도 당장 이용하기 쉬운 다른 조달수단을 함께 활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녹색프리미엄이다. 녹색프리미엄은 기업이 한국전력에 기존 전기요금에 추가 요금을 내고 재생에너지로 생산한 전력을 사용했다는 확인서를 받는 방식이다. 발전사업자와 별도의 장기계약을 맺어야 하는 PPA보다 절차가 간단하고 접근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다.
실제로 국내 K-RE100 시장에서는 녹색프리미엄 중심의 조달구조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말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K-RE100 재생에너지 조달 규모는 크게 늘었지만 녹색프리미엄 중심의 조달 구조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연구원은 지난 7월 이 보고서의 정책적 시사점을 소개하며 장기 PPA 시장 정착과 재생에너지 속성 인증체계 정비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녹색프리미엄은 기업이 특정 재생에너지 발전설비의 전력을 직접 구매하는 방식은 아니다. 이 때문에 신규 재생에너지 발전설비 확대와 직접 연결되는 PPA 등에 비해 추가성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재생에너지 사용뿐 아니라 추가적인 감축 효과까지 요구하는 사례가 늘면서 기업들이 PPA, 자가발전 등 보다 직접적인 조달수단을 확대할 유인도 커지고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도 글로벌 기업들의 공급망 요구에 따라 녹색프리미엄 외에 REC, 자가발전, PPA 등의 비중이 점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정부가 먼저 손을 댄 곳은 발전사업자와 기업 사이의 연결이다. PPA를 원하는 기업과 재생에너지를 팔려는 발전사업자가 모두 있지만 서로의 조건을 확인하고 거래 상대방을 찾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 7월 PPA 중개플랫폼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43개 기업·협회 등이 참여했고, 플랫폼을 활용하겠다는 PPA 수요와 공급 물량은 각각 1GW 안팎으로 조사됐다.
시장의 반응도 이런 상황을 보여준다. 8월 27일 플랫폼이 공식 출범했고, 출범식에서는 태양광·풍력 약 210MW 규모의 첫 계약을 위한 업무협약도 체결됐다. 9월 7일 기준 플랫폼에 등록된 물량 역시 구매 491MW, 판매 353MW로 수요가 공급보다 많았다. 재생에너지가 전혀 없어서 못 사는 시장이라기보다 필요한 기업과 발전사업자를 제대로 연결하지 못했던 시장에 가까웠던 셈이다.
하지만 거래 상대방을 찾는 문제만 해결한다고 PPA가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실제 계약을 검토할 때는 발전가격에 더해 송·배전망 이용요금과 보완 전력 비용 등 여러 비용을 함께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중개플랫폼에 이어 망 이용요금 지원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에너지공단은 지난 8월 11일 ‘PPA 송·배전망 이용요금 지원사업’을 공고하고 재생에너지 PPA 활성화와 기업의 비용 부담 완화를 지원하기로 했다.
여기에 전력을 실제로 실어 나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가 남는다. 재생에너지 발전설비가 많은 지역과 전력 수요가 집중된 수도권 사이의 계통 여건이 충분히 개선되지 않으면 발전량이 늘어나도 기업이 필요한 곳에서 전력을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어렵다. 발전사업자와 기업을 연결하는 시장을 만들어도 물리적인 전력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거래 확대에는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결국 국내 RE100 시장은 이제 ‘재생에너지를 얼마나 더 생산할 것인가’만 고민하는 단계에서 벗어나고 있다. 기업이 원하는 재생에너지를 찾고, 계약하고, 실제로 공급받을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 일이 새로운 과제가 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중개플랫폼뿐 아니라 망 이용요금 구조와 장기계약에 따른 가격 위험, 송전망 확충, 보완 전력 비용 등 거래 과정의 걸림돌을 함께 손질해야 한다.
RE100 참여 기업이 늘어나는 것만으로 시장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늘어난 수요가 실제 구매로 이어지고, 발전된 재생에너지가 기업의 전력 사용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RE100 시장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