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다시 뜨는 청정수소, 세계가 1300억달러 베팅한 이유

에너지 안보·산업 탈탄소 수단으로 가치 재조명
570여개 프로젝트에 투자 확정.. 높은 생산비·수요 부족은 여전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국제 유가와 가스 가격이 급등하면서 한동안 높은 비용 때문에 주춤했던 청정수소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청정수소가 단순히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한 미래 에너지원이 아니라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공급망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재평가되면서다. 이를 증명하듯 실제 글로벌 청정수소 프로젝트에 확정된 투자 규모는 1300억달러를 넘어섰다.

 

가히 천문학적인 투자 규모에서도 알 수 있듯 청정수소에 대한 기대감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지만 현실은 그 기대감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생산비가 여전히 높고 실제 수요가 충분하지 않아 프로젝트가 축소되거나 취소되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음이 그 증거다. 결국 청정수소가 본격적인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으려면 비용을 낮추는 동시에 안정적인 수요와 공급망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다시 보는 수소. 탈탄소 넘어 에너지 안보 수단으로 부상
청정수소가 다시 주목받는 배경에는 최근의 에너지 시장 불안이 자리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이하 FT)는 지난 10일(현지시간) 국제 유가 충격이 청정수소에 대한 관심을 되살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화석연료 가격이 급등하면서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이 공급망 위험을 다시 체감했고 이를 낮출 대체 에너지원의 필요성도 커졌다는 분석이다.

 

청정수소를 바라보는 시선에 변화가 생겼다는 의미다. 기존의 청정수소는 모든 전력을 대신하는 에너지원으로 대접받아왔지만 최근 유가 급등 등 변화하는 기류를 타고 전기만으로 탈탄소하기 어려운 산업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유·비료처럼 기존부터 수소를 사용하는 산업은 물론 철강과 장거리 운송 등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거론될 정도로 입지를 넓혀가는 모양새다.

 

FT에 따르면 프랑스 에너지기업 에어리퀴드의 프랑수아 자코 최고경영자는 최근 유럽뿐 아니라 일본과 한국 관계자들과도 청정수소 활용을 놓고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에너지 위기를 겪으면서 청정수소를 단순한 친환경 연료가 아닌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바라보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투자도 늘고 있다. 글로벌 수소기업 최고경영자들이 참여하는 산업계 협의체인 수소위원회(Hydrogen Council)는 9월 1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글로벌 수소산업 동향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번 보고서에는 약 70명의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 의견과 각국의 프로젝트·정책 동향이 담겼다.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청정수소 프로젝트 가운데 투자가 확정된 규모는 1300억달러를 넘어섰다. 투자 대상은 570개가 넘는 프로젝트이며 이들 프로젝트의 청정수소 생산능력은 연간 약 690만톤에 달한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이 가운데 약 90%가 이미 가동됐거나 건설 단계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단순히 정부나 기업이 장기적인 계획으로 발표한 사업이 아니라 실제 자금이 투입돼 생산시설을 짓거나 가동하는 단계에 들어간 프로젝트가 대부분이라는 의미다.

 

실제 생산능력도 빠르게 늘었다. 수소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가동 중인 청정수소 생산능력은 연간 약 170만톤으로 1년 전보다 약 2배 증가했다. 청정수소 시장이 아직 초기 단계이기는 하지만 실제 생산시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다만 투자 규모만으로 청정수소 시장의 장밋빛 미래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가격이다. 현재 청정수소는 천연가스 등을 이용해 생산하는 기존 수소보다 생산비가 높다. 특히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물을 전기분해해 생산하는 이른바 그린수소는 생산 과정의 탄소 배출을 크게 낮출 수 있지만 전력 가격과 수전해 설비 비용 등의 영향을 크게 받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해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

 

◆ 1300억달러 몰렸지만 비싼 수소·수요 부족은 숙제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지만 청정수소가 당장 경쟁력 있는 에너지원으로 자리 잡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로이터통신은 10일(현지시간) 청정수소 투자 규모가 1300억달러를 넘어섰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높은 생산비와 부족한 수요 때문에 일부 프로젝트가 축소되거나 취소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철강과 장거리 운송처럼 청정수소의 유력한 수요처로 꼽혀온 산업에서도 기존 연료보다 높은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수소 생산시설을 먼저 지어도 이를 구매할 기업이 없다면 사업성이 떨어지고, 반대로 수요기업 역시 공급망과 가격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장기간 구매를 약속하기 어렵다. 생산·수요·인프라가 서로를 기다리는 구조가 시장 확대의 걸림돌인 셈이다.

 

지역별로는 중국의 영향력이 두드러진다. 수소위원회에 따르면 중국은 전 세계 투자 확정 재생수소 생산능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유럽과 미국도 생산시설을 확대하고 있지만 중국에 생산능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향후 청정수소 역시 배터리·태양광처럼 공급망 경쟁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국도 공급망 확보가 중요한 과제다. 국내 생산만으로 필요한 청정수소를 모두 충당하기 어려운 만큼 해외 공급원을 다변화하고 동시에 철강·석유화학·발전·운송 등 국내 산업에서 안정적인 수요를 만들어야 한다.

 

수소위원회는 현재 각국 정책이 계획대로 시행될 경우 2030년까지 연간 약 600만톤의 청정수소 수요가 뒷받침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기존 정책을 충실히 이행하면 추가로 약 500만톤의 수요가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다고 봤다. 결국 앞으로 청정수소 시장의 경쟁력은 누가 더 많은 생산시설을 짓느냐보다, 얼마나 싸게 생산하고 안정적으로 운송하며 실제 구매할 수요처까지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는 셈이다.

 

국제 유가와 에너지 공급망 불안이 반복되는 상황에서 청정수소는 비싼 미래 에너지원에서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위한 전략 자원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다만 1300억달러에 달하는 투자가 실제 시장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생산비 절감과 수요 창출이라는 두 과제를 동시에 풀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