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송전망 늘려야 하는데 주민은 반발.. 해외는 보상 넘어 이익공유

한국, 철탑 통합·지중화 이어 햇빛소득마을 추진 본격화
영국은 전기요금 할인·지역기금, 호주는 초기 참여·혜택 공유

 

[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인공지능 혁명과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으로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송전망 건설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러나 전력을 실어 날라야 할 송전선로가 지나는 지역마다 격렬한 주민 반발에 부딪히면서 전력망 확충 사업은 추진력 대신 심각한 병목 현상을 겪는 모양새다. 국가적 명분만으로는 더 이상 지역사회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경고등이 켜진 셈이다.

 

이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주요국들은 송전망 구축의 성패가 주민 수용성에 달려 있다고 보고 대대적인 정책 전환에 나서고 있다. 단순한 손실 보상을 넘어 물리적 환경 개선과 장기적인 경제적 유인, 그리고 초기 의사결정 권한까지 제공하는 다각도의 해법이 현장에 도입되는 추세다.

 

최근 한국 정부가 송전탑 기수 감축과 지중화, 발전 수익 공유를 골자로 한 대책을 발표한 가운데 영국과 호주 역시 전기요금 직접 할인과 국가 차원의 지역사회 참여 가이드라인을 내놓으며 갈등 중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력망 투자가 불가피해진 시대, 글로벌 주요국들이 주민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떤 해법을 펼쳐들고 있는지를 살펴볼 때다

 

◆ 아무리 시급해도 주민 반발 앞에서는 무용지물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지난 15일 국무회의에 ‘송전망 건설 수용성 제고 방안’을 보고했다. 신설 선로와 기존 선로를 통합해 새로운 철탑을 줄이고 주민 밀집지역에는 지중화를 확대하는 것이 골자다.

 

정부는 국가기간망 2169㎞ 가운데 최대 969㎞를 기존 선로와 통합하면 당초 계획된 철탑 4723기를 2509기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신설 철탑을 최대 2214기, 약 40% 줄이는 규모다. 선로 통합에 따라 공사비와 사업 기간도 10~20% 줄어들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주민에게 직접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방안도 담겼다. 송전망 주변에 ‘계통 햇빛소득마을’을 조성해 태양광 발전 수익을 주민에게 나누고 가구당 연간 최대 300만원의 소득을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주민 밀집지역에서는 지중화를 확대하고 새로 건설하는 345㎸ 변전소의 인출 구간도 지중화를 우선 검토한다.

 

외신도 한국 정부의 이러한 행보에 주목했다. 블룸버그는 정부 발표 당일 '한국, 전력망 확충 과정에서 송전탑 줄이는 방안 추진'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보도하며 관심 보였다. 이처럼 송전망 확대와 지역 주민 갈등 간의 긴장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외신이 이처럼 한국 정부의 발표에 주목한 것은 송전망 확충과 주민 갈등의 대립이 비단 한국만의 과제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전력 수요 증가와 재생에너지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는 영국과 호주 등에서도 지역사회 갈등을 줄이기 위한 제도 마련이 한창이다.

 

◆ 영국, 송전망 주변 주민에 전기요금 할인
영국은 송전망이 들어서는 지역에 직접적인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수용성을 높이고 있다. 영국 에너지안보·넷제로부(DESNZ)는 지난해 3월 ‘전력 송전망 인프라 커뮤니티 펀드’ 가이던스를 발표했다. 송전망 인프라 조성 지역이 경제·사회·환경 개선에 활용할 수 있는 기금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이어 11월 개정된 가이던스에서는 지역사회가 기금의 사용처와 우선순위를 직접 결정하도록 하는 원칙도 추가됐다. 이와 함께 인근 가구의 전기요금을 직접 낮춰주는 제도도 추진 중이다. 영국 정부는 2025년 3월 신규 또는 대폭 증설되는 육상 송전망 인근 가구에 전기요금을 할인해 주는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올해 7월엔 구체적인 제도 설계안도 공개했다.

 

설계안에 따르면 적격 송전망으로부터 500m 이내에 거주하는 가구는 연간 최대 250파운드의 전기요금을 최장 10년간 할인받을 수 있다. 영국 정부는 관련 법령을 정비해 2027년 상반기부터 이를 시행한다는 구상이다. 송전망 건설로 영향받는 지역에 일회성 현금을 지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기금과 전기요금 할인 등으로 장기적인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반면 호주는 주민 참여 자체를 송전망 사업의 핵심 절차로 규정하고 있다. 호주 에너지장관협의체는 2024년 7월 ‘전력 송전 프로젝트의 지역사회 참여 및 혜택에 관한 국가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송전망 사업자가 초기부터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의견을 반영하고 사업으로 발생하는 혜택을 공유하도록 하는 원칙을 담았다.

 

이 가이드라인은 토지 소유자에 대한 법적 보상과 지역사회 전체에 돌아가는 혜택을 명확히 구분한다. 농민과 호주 원주민 공동체, 지역 주민 등이 초기 논의부터 참여해 지역 특성에 맞는 혜택을 직접 설계하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호주 연방정부는 올해 2월 관련 페이지를 업데이트하며 이 가이드라인이 신규 송전사업의 지역사회 참여를 위한 표준 기준이라고 재확인했다.

 

한국의 ‘계통 햇빛소득마을’은 송전망 입지 지역에 경제적 혜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영국의 커뮤니티 펀드나 전기요금 할인과 맥락을 같이한다. 다만 호주처럼 사업 초기 단계부터 주민을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시키는 절차적 접근은 향후 한국 송전망 정책이 참고할 만한 대목이다.

 

결국 송전망 확충의 관건은 얼마나 많은 선로를 얼마나 빨리 건설하느냐에만 있지 않다. 전력망 확충이라는 국가적 명분 뒤에 지역사회가 감수해야 하는 부담을 어떻게 줄이고 사업의 혜택을 누구와 어떻게 나눌 것인지가 함께 다뤄져야 한다.

 

AI와 재생에너지 확대로 전력망 투자가 선택이 아닌 필수인 시대, 주민 수용성을 확보하기 위한 각국의 해법도 진화하고 있다. 한국 역시 철탑 감축과 지중화라는 물리적 해법, 발전 수익 공유라는 경제적 해법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이제는 이 정책들이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갈등을 완화할 수 있을지 본격적으로 검증해 나가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