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전력망 먼저 깔까, 계약부터 할까.. AI 시대 맞물린 전력 비용 잔혹사

미 하원, 데이터센터 전력망 증설 비용 부담 법안 417 대 3 통과
한국도 데이터센터·반도체 전력 확보 비상…한전 25조원 선납 제안은 거절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인공지능(AI) AI 데이터센터가 폭증하면서 전력망 투자비를 누가 부담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이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불거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논쟁이 법제화 단계로 넘어갔다. 데이터센터에 새로 전력을 공급하는 데 필요한 발전소와 송전망 건설 비용을 일반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못하도록 막는 법안이 하원을 통과한 것이다.

 

반면 한국은 아직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했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에 전력을 공급하려면 송전망 확충이 시급하지만 막대한 초기 투자비를 누가 먼저 부담할 것인지를 두고 답보 상태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관을 극명히 보여주는 사건이 최근 벌어졌다. 한국전력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5년 치 전기요금 25조 원을 미리 내달라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것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확인되듯 AI와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전력을 확보하는 문제는 단순히 발전량을 늘리는 선에서 끝나지 않는다. 수요가 확실해지기도 전에 전력망부터 깔아야 하는 상황에서 그 부담을 누가 먼저 짊어질 것인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 셈이다.

 

◆ 미국, 데이터센터 전용 요금 넘어 전력망 인프라 비용까지 정조준
미 하원은 16일(현지시간) 데이터센터의 전력 인프라 비용을 다른 소비자에게 전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소비자 보호 법안(Ratepayer Protection Act)'을 찬성 417표, 반대 3표로 가결했다. 이 법안은 각 주의 전력 규제기관이 데이터센터 같은 대규모 전력 소비시설에 신규 발전·송전 설비 비용을 직접 부담시키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최종 확정까지는 상원 심사가 남아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조치를 데이터센터 급증에 따른 일반 가정의 전기요금 인상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분석했다. 다만 법안이 최종 통과되더라도 당장 요금이 내려가는 것은 아니며 실제 비용 분담 방식은 각 주의 전력 규제기관 몫으로 남는다. 사실 연방 법안이 발의되기 전부터 주 단위에서는 이미 제도 개선이 활발히 진행되어 왔다. 대표적인 곳이 오하이오주다.

 

현지 전력회사 AEP 오하이오는 2025년부터 데이터센터를 별도 고객군으로 분리해 관리하는 전용 요금제를 도입했다.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전력을 신규 신청하거나 시설을 확장하려면 별도의 심사와 전력 수요 검토를 거쳐야 하며, 계통에 미치는 영향에 따라 전력 공급 시기와 계약 조건이 달라지는 방식이다. 오하이오 공공서비스위원회도 지난달 데이터센터로 인해 일반 소비자의 부담이 늘지 않도록 추가 대책을 마련하라고 AEP 오하이오에 요구한 바 있다.

 

조지아주는 한발 더 나아가 직접적인 비용 부담을 요구하고 나섰다. 조지아파워는 데이터센터 같은 대규모 전력 사용자에게 인근 전력 인프라 비용을 선납하도록 하고, 장기계약과 최소요금 체계는 물론 계약 해지 시 위약금까지 부담시킨다. 대형 시설이 사업을 중단하거나 예상보다 전력을 적게 쓰더라도, 그 부담이 고스란히 일반 가정이나 소상공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하려는 취지다.

 

결국 미국에서 벌어지는 논의는 데이터센터가 실제로 쓰는 전기요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핵심은 데이터센터를 짓기 위해 변전소와 송전선로를 신설할 때 발생하는 인프라 투자비다. 데이터센터가 들어설 것을 예상해 전력망을 먼저 깔았다가 사업이 지연되거나 무산되면 투자비를 회수하기 어렵다.

 

반대로 수요가 완전히 확정될 때까지 기다리면, 정작 데이터센터가 완공돼도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는 병목 현상이 생긴다. 미국 여러 주가 전력 사용량뿐 아니라 계약 기간, 최소 사용량, 인프라 구축비까지 꼼꼼히 따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한국 수도권 신청 522건 중 승인은 10건 불과
한국은 전력 확보 자체부터 난항을 겪고 있다. 전력·에너지 분석기관 비트플래닛 리서치랩에 따르면 2024년 8월부터 올해 3월까지 수도권 전력계통영향평가를 신청한 데이터센터는 522건, 총용량은 3만3592MW에 달했다. 그러나 최종 전력 공급 승인을 받은 사업은 단 10건(1010MW)에 그쳤다.

 

전력계통영향평가는 대규모 전력 사용 시설이 기존 전력망에 안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절차다. 아무리 좋은 부지를 확보하고 대규모 투자를 계획해도 전력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업 자체가 진행될 수 없다.

 

문제는 전력망 확충에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AI 데이터센터는 단기간에 대규모 전력을 끌어 써야 하는 반면 송전선로와 변전소는 부지 선정부터 인허가, 건설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이 소요된다. 투자 결정 시점과 전력망 완성 시점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결국 누군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먼저 움직여야 하는 구조다.

 

최근 한전과 삼성전자·SK하이닉스 간 협상이 결렬된 사례가 이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한전은 반도체 클러스터용 전력망 건설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삼성전자에 약 20조 원, SK하이닉스에 약 5조 원 등 총 25조 원 규모의 5년 치 전기요금 선납을 제안했다. 그러나 양사는 장기적인 반도체 업황을 장담하기 어렵고, 당장 거액의 자금을 묶어두기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공통된 숙제를 안고 있다. 기업은 전력이 확보되어야 공장을 지을 수 있지만 전력망은 오히려 기업의 투자가 최종 확정되기 전에 공사를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기업이 비용을 선납하면 전력망 건설을 앞당길 수는 있지만 향후 전력 수요가 줄어들면 그 위험을 기업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반대로 한전이 모든 비용을 미리 짊어졌다가 수요가 예측에 못 미치면 그 부실은 전기요금 인상이나 한전의 재무 악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 데이터센터에 별도 요금제와 장기계약을 요구하는 것도 결국 선제적 인프라 구축에 따른 추가 비용을 기존 소비자에게 떠넘기지 않기 위해서다.

 

국내에서도 AI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같은 갈등은 반복해서 불거질 수밖에 없다. 특히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처럼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첨단 산업시설이 동시다발적으로 들어서면, 전력망 투자 규모는 더욱 불어날 것이다.

 

단순히 데이터센터나 반도체 공장을 얼마나 많이 유치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필요한 전력망을 누가 먼저 구축하고 그 막대한 비용을 어떻게 회수할지에 대한 제도적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미국은 데이터센터용 전력망 비용을 별도로 산정하는 방향으로 법적 기틀을 다지고 있다. 한전의 25조 원 선납 요구가 무산된 지금, 한국 역시 기존 방식만으로는 거대한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전력망 투자 비용 분담에 관한 정교한 원칙 정립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