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글로벌 액화천연가스(LNG) 조달 전략의 판도가 흔들리고 있다. LNG 수요가 폭증하는 가운데 중동 정세 불안과 해상 운송로의 지정학적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가격을 낮추고 물량을 확보하는 기존 방식만으로는 더 이상 공급 안정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구매자들 사이에 확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구매자들은 공급처를 분산하고 계약 유연성을 높이는 동시에 저장시설과 전용 선박, 생산 지분까지 직접 확보해 공급망 전체의 회복력을 끌어올리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조달 전략의 무게중심도 이제 LNG를 사들이는 문제를 넘어 공급이 끊겼을 때 무엇으로 메울지를 따지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같은 요충지에서 차질이 생기면 가격 급등을 넘어 운송 자체가 전면 중단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급망 다변화는 이제 단순한 위험 관리 차원을 넘어 조달 전략의 중심축으로 떠오른 셈이다.
◆ 호르무즈 충격에 조달전략 다시 짠다
맥킨지가 지난 11일 공개한 LNG 구매자 조사에서도 이런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맥킨지는 지난 4월 14개국 LNG 구매자 30곳을 대상으로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공급 차질 이후의 조달전략 변화를 조사했는데 조사 대상 기업이 속한 국가들은 글로벌 LNG 시장의 약 80%를 차지한다.
조사 결과 응답자의 약 80%는 최근의 지정학적 충격을 계기로 LNG 조달전략을 변경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번 변화는 일시적으로 현물 물량을 늘리는 수준에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구매자 상당수가 향후 수년간 공급계약과 조달 포트폴리오, 공급망 투자까지 손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가장 구체적인 변화는 역시 공급처 다변화다. 응답자의 93%가 향후 2~3년 동안 공급자를 늘리거나 LNG 공급 지역을 다변화할 계획이라고 답했는데 이는 특정 공급자와 장기계약을 맺어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던 기존 방식에 여러 공급원과 거래할 수 있는 선택지를 더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LNG 시장의 구조적 특성상 생산국과 소비국이 떨어져 있어 해상운송 의존도가 높다는 점도 이런 흐름을 뒷받침한다. 액화·운송·저장·재기화로 이어지는 과정 가운데 어느 한 단계에서만 문제가 생겨도 최종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물량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호르무즈 해협처럼 핵심 항로의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공급처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특정 공급국의 LNG를 다른 항로로 운송할 수 있는지, 대체 공급원이 필요한 시점에 실제로 물량을 댈 수 있는지, 국내에 이를 받아 저장할 시설이 있는지까지 함께 따져봐야 하는 문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LNG 구매자들이 말하는 다변화는 공급국 숫자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장기계약과 단기·현물 구매를 조합하고 서로 다른 지역의 공급원을 포트폴리오에 담아 특정 지역의 공급 차질이 전체 조달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움직임은 한국과 일본에서도 확인됐다. 맥킨지 조사에서 양국 응답자의 80%가 향후 2~3년간 공급자 확대 또는 지역 다변화를 계획하고 있다고 답한 것이 그 증거다. LNG 수입 의존도가 높은 동북아 구매자들에게는 공급망 안정성이 이미 가격 못지않은 조달 기준으로 자리잡은 셈이다.
공급처를 늘리는 움직임과 맞물려 계약 자체를 다시 설계하려는 시도도 눈에 띈다. LNG 구매자들은 공급 차질이 발생했을 때 대응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계약상 보호장치를 강화하는 데 관심을 보이는데 맥킨지 조사에서 52%가 향후 2~3년간 계약상 보호장치를 강화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그중에서도 불가항력(force majeure) 조항이 주요 관심 대상으로 꼽혔다.
지정학적 충돌이나 운송 차질이 발생했을 때 계약상 의무를 어느 수준까지 면제할지, 위험을 공급자와 구매자 중 누가 부담할지 등을 사전에 정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LNG 조달에서 계약은 물량과 가격을 정하는 수단을 넘어 공급 차질에 대응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
◆ 장기계약만으로 부족, 계약·저장·선박까지 입체적 방어 요구돼
이 흐름이 장기계약의 중요성 자체가 낮아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구매자들은 장기계약으로 기본 물량을 확보하되 단기·현물시장과 다른 공급처도 함께 활용할 수 있도록 조달 포트폴리오를 짜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상황이나 공급 차질에 대응할 수 있도록 계약의 유연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해지고 있다. 공급 차질이 발생했을 때 물량과 인도 조건을 어떻게 조정할지, 계약상 위험을 어느 쪽이 부담할지 등을 사전에 정교하게 설계해야 실제 충격에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계약뿐 아니라 물리적 공급망 자체에 투자를 늘리는 흐름도 뚜렷하다. 맥킨지 조사에서 응답자의 66%가 저장시설, LNG 선박, 상류 부문 지분 투자 등 공급망 회복력을 높이기 위한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고 답했다. 세부적으로는 저장 인프라 투자가 30%로 가장 많았고, 이어 LNG 선박 19%, 상류 부문 지분 투자 17%, 부유식 저장·재기화설비(FSRU) 15%, 재기화 설비 13%, 인터커넥터 6% 순이었다.
이는 LNG 조달 경쟁이 계약서 안에서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장시설이 충분하면 가격이 높거나 공급이 불안정한 시기에 비축 물량으로 시간을 벌 수 있고, 선박을 확보하면 운송시장 병목에 대응할 여지가 커진다. 생산시설이나 상류 프로젝트에 직접 투자하는 방식 역시 공급원 자체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또 하나의 수단이다.
결국 구매자들이 구축하려는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여러 개의 안전판인 셈이다. 공급처를 나누고 계약의 유연성을 높이는 동시에 저장·운송 능력을 확보하고 필요하면 생산 단계까지 투자해 어느 한 지점의 충격이 전체 LNG 조달로 번지는 것을 막는 구조다.
다만 이런 대응이 목전의 위험을 모두 해소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맥킨지 조사에서 현재 수준의 시장 변동성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답한 비율은 거래 역량 28%, 위험관리 역량 25%에 그쳤다. 공급망 회복력은 강화되고 있지만 지정학적 위험과 가격 변동성을 관리할 내부 역량은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한 국내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LNG 조달에서 가격 경쟁력만큼 공급 안정성 확보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다"며 "특정 지역이나 공급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면서 장기계약과 단기 조달, 저장·운송 인프라를 어떻게 조합할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흐름에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 LNG 조달은 장기계약을 통한 안정적 물량 확보와 필요 물량을 시장에서 조달하는 방식을 함께 활용해왔다. 앞으로는 여기에 공급처의 지역적 분산, 계약 조건의 유연성, 저장·운송 능력을 어느 수준까지 갖출지를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LNG 시장의 새로운 경쟁력은 싼 가격에 물량을 확보하는 데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공급 차질이 발생하더라도 다른 공급원과 계약, 저장시설, 운송수단을 활용해 실제 수요처까지 LNG를 가져올 수 있는 능력, 이른바 조달 회복력이 새로운 경쟁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