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항공유 비상, 한국산 하루 12만9000배럴 몰렸다

중동 정제제품 수출 60% 급감에 ARA 재고 7년 만에 최저
정유사 가동 확대에 가격차까지 겹쳐..공급망 재편 얼마나 갈지는 변수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유럽이 중동발 공급 차질로 올해 4분기 하루 51만배럴의 항공유 부족에 직면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한국산 항공유가 유럽으로 몰리고 있다. 로이터가 원자재 정보업체 케이플러의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9월 들어 한국에서 유럽으로 수출된 항공유는 하루 평균 12만9000배럴로 2022년 10월 이후 가장 많았다. 선박 운항 데이터를 제공하는 LSEG에서도 비슷한 규모의 물량이 확인됐다.

 

로이터는 21일 에너지 시장조사업체 에너지 애스펙츠를 인용해 유럽의 4분기 항공유 수급이 하루 평균 51만배럴 부족할 것으로 전망했다. 같은 기간 미국은 하루 1만8000배럴, 아시아·태평양은 41만9000배럴의 공급 여력이 있을 것으로 분석됐다. 중동에서 생긴 공급 공백을 다른 지역이 나눠 메우는 구조지만 두 지역의 여력을 합쳐도 약 43만7000배럴로 유럽의 부족분에 못 미친다. 유럽이 당분간 여러 지역에서 물량을 끌어와야 하는 이유다.

 

◆ 중동 정제제품 수출 60% 감소에 공급망 확보 나서
유럽 항공유 시장이 흔들린 직접적인 원인은 중동산 공급 차질이다. 중동은 원유뿐 아니라 휘발유, 경유, 항공유 같은 정제제품의 주요 수출 지역이다. 이곳에서 생산된 제품이 유럽으로 들어오면서 유럽 내 수요의 상당 부분을 채워왔는데 이 물량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지난 11일 발표한 9월 석유시장보고서에서 중동의 정제제품과 LPG 수출이 전쟁 발발 전인 2월보다 약 60%, 하루 370만배럴 감소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걸프 지역의 8월 경유 순수출은 전쟁 전 수준의 4분의 1 정도인 하루 39만배럴에 그쳤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물류 차질에 러시아 정유시설에 대한 공격까지 겹치면서 중동과 러시아에서 빠져나오는 정제제품 물량이 크게 줄었다는 설명이다.

 

항공유는 이런 공급 충격에 특히 취약한 제품이다. IEA는 별도 분석에서 항공유가 세계 석유 수요의 약 7%를 차지하며 중동 생산·수출이 장기간 감소할 경우 다른 지역이 생산을 빠르게 늘려 대체하기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증산으로 공백을 메우기 어렵다 보니 특정 지역의 공급 차질이 곧바로 국제 가격과 교역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그 여파는 유럽의 재고에서 이미 확인된다. 로이터는 이날 유럽의 대표적인 석유 저장·거래 거점인 암스테르담·로테르담·앤트워프(ARA) 지역의 항공유 재고가 9월 10일까지 일주일간 집계에서 7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보도했다. 공급 차질이 길어지는 상황에서 재고마저 줄어들면서 유럽이 외부에서 항공유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 가격차가 부른 한국산 유럽행 언제까지
한국산 항공유가 먼 유럽까지 향하는 배경에는 가격 차이가 있다. 공급 차질로 유럽의 석유제품 가격이 강세를 보이면서 운임과 시간이 더 들더라도 아시아산 제품을 유럽으로 보내는 쪽이 경제성을 갖게 됐다. 장거리 운송에는 비용이 추가되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가격 차이가 충분히 벌어지면 아시아 정유사로서는 물량을 유럽으로 돌릴 유인이 생긴다.

 

로이터는 이날 아시아와 유럽의 디젤 가격 차이가 확대되면서 아시아산 석유제품의 유럽행 수출이 다시 매력적인 거래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산 항공유의 유럽행 증가 역시 이 같은 지역 간 가격 차이와 국내 정유사의 생산 확대가 맞물린 결과로 풀이된다.

 

국내 정유업계가 유럽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것은 대규모 정제설비와 높은 수출 비중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정유사들은 원유를 수입해 휘발유, 경유, 항공유 등 다양한 제품으로 정제한 뒤 국내외 시장에 판매하는데 이 가운데 항공유는 대표적인 수출 품목이다.

 

실제로 로이터는 한국의 7월 항공유 생산량이 약 1389만배럴로 7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하루 평균으로 환산하면 약 45만배럴이다. 같은 달 국내 정유사의 원유 처리량은 하루 270만배럴로 6월보다 16% 늘었다. 정유사들이 가동을 끌어올린 상황에서 유럽의 높은 가격이 수출 물량을 끌어당긴 셈이다.

 

유럽의 공급 부족을 겨냥한 움직임은 한국에 그치지 않는다. 로이터는 지난 15일 나이지리아 단고테 정유소가 올해 2분기 하루 약 8만배럴의 항공유를 유럽으로 수출했다고 보도했다. 단고테는 미국에 이어 유럽의 두 번째로 큰 항공유 공급처로 부상했다. 미국과 아프리카, 아시아가 중동의 빈자리를 나눠 메우는 모양새다.

 

관건은 이런 재편이 얼마나 이어질지다. 중동산 정제제품 공급이 정상화되지 않으면 유럽은 당분간 먼 지역에서 항공유를 들여와야 한다. IEA는 지난 11일 보고서에서 중동산 정제제품 공급의 회복 시점이 늦어지고 있다며 올해 남은 기간의 석유 공급 전망을 다시 낮췄다. 2026년 세계 석유 공급량 전망은 하루 평균 1억70만배럴로 종전보다 130만배럴 하향했고, 중동 생산국의 공급이 완전히 회복되는 시점은 2027년으로 미뤘다.

 

다만 한국산 물량의 유럽행 증가가 곧 장기 공급계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항공유는 국제 가격과 운송비에 따라 물량이 빠르게 움직이는 상품이어서 유럽과 아시아의 가격 차이가 좁혀지거나 중동산 공급이 정상화되면 한국산 물량이 다시 아시아 시장으로 돌아올 수 있다. 반대로 유럽의 공급 부족이 4분기까지 이어진다면 한국 정유사의 유럽행 항공유 수출도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