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연구실 나온 핵융합.. 상용화 경쟁에 38억달러 몰렸다

올해 첫 8개월 투자액, 지난해 연간 기록 이미 넘어
AI 전력수요까지 가세.. 민간기업들 실증로·발전소 건설 경쟁

 

[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태양의 에너지 생성 원리를 지상에서 구현하는 핵융합에 거액의 민간자금이 몰리고 있다. 올해 첫 8개월 동안 핵융합 스타트업에 유입된 투자금만 38억달러에 달해 지난해 한 해 동안의 기록을 넘어선 것. 수십 년간 정부와 연구기관이 주도해온 핵융합 연구가 민간기업의 발전소 건설 경쟁으로 옮겨가면서 투자금의 성격도 달라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핵융합에 돈이 몰리는 배경에는 달라진 전력 수요와 에너지 시장이 있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비롯해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 빠르게 커지면서 안정적인 전력 공급원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거세졌기 때문이다. 원전과 재생에너지에 이어 아직 상용화되지 않은 핵융합까지 차세대 전력원 후보로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다만 투자금이 늘었다고 상용화가 가까워진 것은 아니다. 기존 핵융합 시설 가운데 소비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전력을 지속적으로 생산한 곳은 없고 상업용 발전소가 전력망에 안정적으로 전기를 공급한 사례도 없다는 것이 방증이다. 막대한 자금이 발전소 건설로 향하고 있지만 상용화를 위해서는 여전히 넘어야 할 기술적 장벽이 남아 있다.

 

◆ 미래 기술 아닌 현재의 기술로 거듭난 핵융합
지난 16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올해 첫 8개월 동안 핵융합 스타트업에 유입된 민간자금이 38억달러로 집계됐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연간 투자액 33억달러를 이미 넘어선 규모로 핵융합 산업에 대한 연간 투자액으로는 사상 최대 수준이다.

 

이번 투자 확대가 이전과 다른 점은 연구개발 자체보다 실제 발전소를 만들기 위한 자금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미국의 핵융합 스타트업 퍼시픽 퓨전이다. 이 회사는 지난 8월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핵융합 시험시설 착공에 들어갔다.

 

구글 전 최고경영자 에릭 슈밋을 비롯해 샘 올트먼, 제프 베이조스, 빌 게이츠 등 기술업계와 투자자들이 핵융합 기업에 자금을 넣고 있다. 헬리온 에너지는 2028년 마이크로소프트에 전력을 공급한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고, 인에르시아 엔터프라이즈 등 다른 스타트업도 2030년대 상용화를 목표로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이처럼 개별 기업 단위의 투자뿐 아니라 산업 전체의 자금 규모도 빠르게 커졌다. 앞서 FT가 인용한 수치가 민간 조사업체 피치북(PitchBook)의 연간 집계라면 핵융합산업협회(이하 FIA)가 별도로 실시하는 서베이 결과는 조금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FIA에 따르면 2026년 7월까지 직전 12개월 동안 핵융합 산업에 유입된 자금은 44억8000만달러로 누적 자금은 142억4000만달러에 이른다. 관련 산업 종사자는 1만6000명을 넘어섰다. 두 기관의 집계 방식은 다르지만 방향은 같다. 공급망을 구성하는 기업도 늘어나면서 핵융합이 국가 연구기관 중심의 장기 프로젝트에서 하나의 산업군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투자가 는 것에 비례해 기술 경쟁도 본격화되는 모습이다. 기본적으로 핵융합은 초고온의 플라즈마를 안정적으로 가두는 방식에 따라 여러 접근법이 존재한다. 강력한 자기장으로 플라즈마를 가두는 방식부터 레이저로 연료를 압축하는 방식까지 기업마다 기술 경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방식이 실제 발전소 건설과 경제성 확보에 먼저 성공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 경쟁에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바로 AI다. 전력 사용량이 급증하는 데이터센터가 등장하면서 각국과 기업들이 장기간 안정적으로 대규모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에너지원 확보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나라가 중국이다. 컨설팅업체 우드매켄지에 따르면 AI 확산의 영향으로 중국의 데이터센터 전체 전력 소비량은 2030년 774테라와트시(TWh)까지 지금의 네 배 수준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렇게 커지는 전력 수요에 대응해 중국은 원전 확충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건설 중인 신규 원전은 약 66기로 집계되는데 이 가운데 절반이 넘는 30여 기가 중국에서 지어지고 있다. 동시에 중국은 소형모듈원자로(SMR)와 핵융합 연구에도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중국의 민간 핵융합 기업 노바퓨전X는 2029년 핵융합 반응에서 투입 에너지보다 많은 에너지를 얻는 순에너지 이득을 달성하고 2030년대 초 첫 실증로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내놓았다.

 

핵융합이 실제 상용화에 성공한다면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수 있다. 태양광이나 풍력처럼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지는 전원이 아니면서 탄소 배출이 거의 없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힌다. 다만 지금의 투자와 개발 경쟁은 어디까지나 이 가능성을 현실의 발전소로 바꾸기 위한 과정에 있다.

 

◆ 천문학적 투자에 비해 구체적 성과는 미흡
투자금이 빠르게 늘고 있지만 기술 개발이 그 속도를 따라가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핵융합 연구에서는 이미 의미 있는 에너지 생산 성과가 나왔지만 이를 실제 발전소의 전력 생산으로 연결하는 데는 여전히 기술적 장벽이 남아 있다.

 

핵융합 반응 자체에서 에너지가 발생했다는 것과 발전소가 외부에서 공급받는 전력보다 더 많은 전기를 만들어 전력망에 공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기 때문이다. FT는 현재까지 핵융합 실험 가운데 시설 전체가 소비한 에너지보다 많은 전력을 지속적으로 생산한 사례는 없다고 지적했다.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실제 발전소로 넘어가기 위해 필요한 기술력이다. 이 수준에 도달하려면 현재의 기술로 섭씨 1억도 이상의 플라즈마를 장시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또 핵융합 과정에서 발생하는 중성자에 견딜 수 있는 소재도 개발해야 한다.
연료로 쓰이는 삼중수소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발전 과정에서 다시 순환시키는 기술도 필요하다. 실험실에서 짧은 시간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것과 수년간 발전소를 가동하며 전력을 생산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연이은 투자로 기술력을 다듬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경제성 부분에 접어들면 더 암울해지기 때문이다. 핵융합 기업들은 2028년부터 2030년대까지 다양한 상용화 목표를 제시하고 있지만 실제 상업용 발전소의 건설비와 운영비, 발전단가는 아직 검증할 수 있는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다.

 

FT는 일부 전문가들이 스타트업들이 제시하는 낙관적인 상용화 일정과 비용 전망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고 전했다. 핵융합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더라도 실제 발전소에서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전기를 생산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민간자금이 계속 유입되는 것은 핵융합이 연구를 넘어 실제 발전소 건설과 전력 공급을 목표로 하는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핵융합 반응의 구현을 넘어 상업용 발전소를 건설하고 실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기술과 사업 모델을 증명하는 데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산업 생태계에서도 확인된다. FIA에 따르면 핵융합 산업의 공급망 지출은 2025년 24% 증가했다. 지난 6월에는 핵융합 관련 공급업체와 개발사, 제조업체, 투자자 등이 참여한 첫 공급망 전시회도 열렸다. 연구기관에서 실험하는 기술을 넘어 실제 장비와 소재, 제조 역량을 필요로 하는 산업으로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올해 첫 8개월 동안 핵융합 스타트업에 38억달러의 투자금이 투입됐다는 것은 연구와 기술 개발에 머물던 투자가 발전소 건설과 상용화 검증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업들은 이제 언젠가 가능한 기술을 연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발전소를 짓고 전력을 판매할 수 있는지를 입증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AI 데이터센터를 비롯해 대규모 전력을 필요로 하는 산업이 커질수록 안정적인 전력원을 확보하려는 수요도 커질 수밖에 없다. 핵융합이 이 수요를 겨냥한 차세대 전력원으로 자리 잡으려면 핵융합 반응을 구현하는 데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장시간 안정적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발전소 운영에 필요한 비용까지 감당할 수 있다는 점을 실제 설비를 통해 보여줘야 한다. 결국 앞으로 핵융합 산업의 경쟁력은 누가 더 많은 투자금을 끌어모으느냐보다 누가 먼저 발전소를 완성해 안정적인 전력 생산과 경제성을 입증하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