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탄소 배출을 줄이는 일은 시작보다 마무리가 훨씬 어렵다. 화석 연료를 바탕으로 한 기존 발전 방식을 태양광이나 풍력으로 바꾸는 초반 감축은 비교적 손쉽지만 배출량을 극단적으로 낮춰 탄소중립의 완성을 뜻하는 '마지막 5%'에 다다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남은 배출을 완전히 없애려면 단순히 발전기를 교체하는 수준을 넘어 송전망과 저장장치, 안정적인 무탄소 전원, 산업공정까지 아우르는 전력 시스템 전체를 새로 설계해야 한다.
여기에 AI 데이터센터와 전기화 확대로 전력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탈탄소의 과제도 한층 복잡해지고 있다. 에너지 수요 자체가 줄지 않는 상황에서 탄소 배출까지 낮춰야 하기 때문이다. 맥킨지의 ‘글로벌 에너지 퍼스펙티브(GEP) 2026’(이하 GEP 2026)에 따르면 2025년 세계 에너지 수요는 2.7% 증가했다. 석유·가스·석탄과 재생에너지가 모두 성장하면서 에너지 전환은 화석연료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는 단계를 넘어 ‘에너지 확장’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처럼 에너지 전환이 대체에서 확장으로 바뀌면서 탈탄소의 비용을 개별 발전원의 단가만으로 따지기도 어려워졌다.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충족하려면 발전량을 확대하는 동시에 전력망과 저장장치, 안정적인 보완 전원까지 갖춰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탄소중립 후반부의 핵심은 개별 발전원의 발전단가를 넘어 전력망과 저장장치, 보완 전원을 포함한 전체 시스템 비용과 공급망 안보를 함께 확보하는 데 있다.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하면서 시스템 전체의 경제성과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 이것이 탈탄소 전환을 추진하는 한국 산업계가 풀어야 할 숙제다.
◆ 태양광·풍력 늘리면 끝? 탄소 줄일수록 전력 시스템 비싸진다
재생에너지 발전단가가 떨어졌다고 해서 탄소중립에 드는 전체 비용까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태양광과 풍력은 발전량이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생산한 전력을 필요한 때까지 저장해야 하고, 발전소가 몰려 있는 지역에서 전력 소비지역까지 보내려면 송전망도 함께 구축해야 한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이런 문제는 더욱 커진다. 전력 수요가 적은 시간에는 발전량이 남을 수 있고 반대로 해가 지거나 바람이 약해지면 발전량이 급격히 줄어들 수 있다. 전력망 확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다. 배터리나 양수발전 같은 저장장치와 필요할 때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안정적인 보완 전원도 함께 갖춰야 한다.
이 때문에 에너지 전환의 경제성을 따질 때 발전소의 발전단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발전·송전·저장·보완 전원·계통 연결 등 전력을 실제 수요처에서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데 필요한 비용까지 함께 봐야 하기 때문이다. 값싼 태양광이나 풍력 발전소를 짓더라도 전력을 필요한 곳에 필요한 시간에 공급할 수 없다면 그 발전단가만으로는 싼 전기라고 평가하기 어렵다.
전력망 투자가 대표적인 경우다. 맥킨지는 글로벌 송배전망 투자 규모가 2025년 연간 약 4430억달러에서 2050년 연간 약 9700억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발전원에 대한 투자만 늘리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 전기를 실어 나르는 네트워크에도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특히 전력망은 수요가 늘어난다고 바로 확충할 수 있는 인프라가 아니라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송전선로는 입지 선정부터 인허가와 주민 수용성, 건설까지 장기간이 소요된다. 대형 변압기처럼 전력망에 필수적인 장비의 공급도 병목이 될 수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를 늘리는 것과 실제 전력 공급 능력을 확충하는 데 시간차가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탄소중립의 후반부에서는 질문 자체가 달라진다. ‘태양광을 얼마나 더 지을 것인가’가 아니라 ‘필요한 순간에 무탄소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 된다는 뜻이다. 원전처럼 대규모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저탄소 전원의 역할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맥킨지는 기준 시나리오인 ‘지속적 모멘텀(Continued Momentum)’에서는 연평균 약 18GW 수준인 원전 순증설이, 탈탄소화 시나리오인 ‘탈탄소화 가속(Decarbonization Delivers)’에서는 2050년까지 연평균 약 40GW 수준으로 확대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원전 비용 하락과 건설기간 단축, 소형모듈원전(SMR)의 반복 생산 등이 현실화될 경우 원전이 안정적인 저탄소 전원의 한 축으로 역할을 확대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다시 커지는 전력 수요.. AI가 만든 탄소중립의 역설
에너지 전환을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변수는 수요의 증가다. 과거의 탈탄소 전략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화석연료를 저탄소 에너지원으로 대체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AI와 데이터센터, 전기차, 산업 전기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이제는 늘어나는 전력 수요 자체를 저탄소 방식으로 감당해야 하는 과제가 추가됐다.
특히 AI 확산과 함께 폭증하는 데이터센터는 새로운 대형 전력 수요처로 부상하고 있다. GEP 2026에 따르면 데이터센터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전력시장에서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부하로 평가된다. 맥킨지는 기준 시나리오에서 데이터센터 전력 수요가 2030년까지 연평균 24% 증가할 것으로 봤으며, 2030년에는 세계 전력 소비의 10~15%를 차지할 가능성도 제시했다. 다만 2030년 이후에는 AI의 효율 개선과 반도체 성능 향상 등에 따라 수요 전망의 불확실성이 커질 수 있다고 봤다.
문제는 AI가 전기를 많이 쓰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요구한다. 단순히 연간 발전량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태양광이나 풍력의 연간 발전량이 충분하더라도 특정 시간대에 전력이 부족하면 별도의 저장장치나 안정적인 발전원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전기차와 산업 전기화도 비슷한 고민을 안게 된다. 내연기관의 연료 수요가 전력 수요로 옮겨가고, 철강·석유화학 등 에너지 다소비 산업의 전기화가 확대될수록 전력망이 감당해야 할 부하는 커지기 때문이다. 에너지 사용이 전기로 전환될수록 탈탄소화가 진전되는 동시에 전력 시스템에 요구되는 역할도 커지는 셈이다.
탈탄소화가 진행될수록 전력망의 부담은 오히려 커질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재생에너지 발전설비를 추가하는 동시에 데이터센터와 산업단지, 전기차가 필요로 하는 전력을 연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발전소와 수요처가 모두 늘어나면서 전력망을 중심으로 에너지 시스템 전체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설비와 원자재 역시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력망 장비와 배터리, 핵심광물, 반도체, 항만 등 에너지 시스템을 구성하는 다양한 공급망이 새로운 안보 리스크가 될 수 있다. GEP 2026은 에너지 안보를 석유나 가스 공급처를 다변화하는 문제를 넘어 에너지 시스템 전반의 공급망 안정성 문제로 확대해 보고 있다.
실제로 공급망이 지역별로 쪼개질 경우 청정에너지 전환 비용이 올라갈 수 있다. ‘분절된 에너지 질서(Fragmented Energy Order)’ 시나리오에서 미국과 유럽연합(EU)이 중국 의존도가 높은 공급망을 중국 밖에서 재구축할 경우, 기준선 대비 두 지역의 태양광 설비 비용은 20~25%, 배터리 저장장치 비용은 40~50% 높아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청정에너지 기술의 가격 경쟁력만으로는 탄소중립 비용을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기술 자체의 가격뿐 아니라 공급망과 무역 질서, 지정학적 갈등까지 에너지 전환의 비용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결국 개별 기술의 가격 경쟁력만으로는 탄소중립의 비용과 속도를 결정할 수 없다. 발전설비의 가격이 낮아져도 전력망과 저장장치, 원자재와 장비 공급망, 인허가와 건설기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실제 전환 속도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변화는 제조업 비중이 높고 전력 다소비 산업이 많은 한국에 더 복합적인 과제를 던진다. 반도체·배터리·철강·석유화학 등 에너지 사용량이 많은 산업의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탄소 배출을 줄여야 하고, AI와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새롭게 늘어나는 전력 수요에도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발전량을 늘리는 것과 동시에 이를 산업 현장까지 전달할 계통을 확충해야 하는 이유다.
종합적으로 보면 탄소중립의 후반부에서 중요한 것은 발전소 하나의 가격이 아님이 분명하다. 만든 전기를 필요한 곳으로 보내고, 필요한 순간에 꺼내 쓰며, 공급이 흔들릴 때도 버틸 수 있는 시스템 전체의 비용과 안정성을 이야기하는 이유다. 재생에너지 발전단가가 아무리 낮아져도 전력망과 저장장치, 안정적인 전원과 공급망이 따라오지 못하면 그 가격 경쟁력이 실제 에너지 비용 절감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GEP 2026이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탄소중립은 발전원을 바꾸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그를 위해서는 전력망을 확충하고 저장장치를 확보하는 동시에 안정적인 전원과 공급망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산업공정의 전환 역시 보조를 맞춰야 한다. 상당 부분의 탄소를 줄인 뒤 남은 마지막 5%를 감축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