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유럽연합(EU)이 인공지능(AI)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규제 완화를 추진하면서 유럽식 디지털 정책 모델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르몽드는 19일(현지시간), EU 집행위원회가 최근 AI 산업 활성화를 목표로 한 디지털 규제 완화 패키지를 검토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개인정보 보호 규정 일부 완화와 AI 관련 법안 시행 연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강력한 규제와 시민 권리 보호’를 핵심 가치로 삼아온 유럽이 미국과 중국이 양분하고 있는 AI 패권 경쟁에 뛰어들겠다는 의지를 표력한 것으로 풀이된다. 눈여겨 볼 부분은 유럽이 기존의 규제 중심 모델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경쟁력 확보를 위해 유연성을 택할 것인지다. 그에 따라 글로벌 AI 산업 지형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 규제 대신 기술 경쟁? 유럽식 모델, 근본적 전환 기로 서다
유럽연합은 오랜 기간 디지털 규제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준을 만들어온 지역이다. 대표적인 사례인 GDPR(일반개인정보보호법)은 글로벌 기업들에게도 강력한 개인정보 보호 의무를 부과하며, 사실상 국제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른바 ‘브뤼셀 효과’로 불리는 현상은 유럽의 규제가 세계 시장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이러한 규제 중심 접근법이 오히려 기술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비판이 점점 커지고 있다. 생성형 AI를 포함한 최신 기술은 대규모 데이터 학습을 기반으로 발전하는데, 엄격한 개인정보 보호 규정과 데이터 활용 제한이 유럽 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와 달리 미국은 OpenAI,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민간 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AI 생태계를 확장하고 있다. 중국 역시 국가 주도의 투자와 데이터 활용을 통해 기술 격차를 좁히고 있다. 이처럼 양대 강국이 속도를 내는 사이, 유럽은 상대적으로 뒤처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정책 전환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EU 집행위원회가 검토 중인 정책 변화는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요약된다. 첫째, GDPR 일부 완화를 통해 AI 학습 데이터 활용을 보다 유연하게 허용하는 방안이다. 둘째, 데이터 접근 규제를 완화해 기업들이 대규모 데이터셋을 보다 쉽게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다. 셋째, 세계 최초의 포괄적 AI 규제인 AI법(AI Act)의 일부 시행을 최대 2027년까지 연기하는 방안이다.
이러한 조치는 산업계의 부담을 줄이고 혁신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유럽이 그동안 유지해온 정책 철학을 수정하는 의미를 갖는다. 즉, ‘규제를 통한 통제’에서 ‘경쟁을 위한 완화’로의 방향 전환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 유럽 내부 갈등, 정치·사회 전반으로 확산
문제는 이러한 정책 변화가 유럽 내부에서 강한 논쟁을 촉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찬성과 반대의 입장은 단순한 정책 차이를 넘어, 유럽 사회의 가치와 정체성을 둘러싼 충돌로 확대되고 있다.
규제 완화를 지지하는 측은 현실적인 위기 대응을 강조한다. 이들은 “AI 기술 경쟁에서 뒤처질 경우 유럽 경제 전체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며, 일정 수준의 규제 완화는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스타트업과 산업계는 현재의 규제 환경이 혁신을 가로막고 있으며,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데이터 접근성과 규제 유연성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반면 반대 측은 유럽의 핵심 가치가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개인정보 보호는 단순한 정책 수단이 아니라 시민의 기본권과 직결된 문제이며, 이를 완화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더 큰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일부 시민단체와 정치권에서는 “규제 완화가 결국 빅테크 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또한 데이터 활용 확대는 감시 사회로의 전환 가능성, 알고리즘 편향 문제, 책임 소재 불명확성 등 다양한 윤리적 문제를 동반할 수 있다. 이러한 우려는 단순한 기술 논쟁을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로까지 연결되고 있다.
이 갈등은 EU 내부 정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회원국 간 입장 차이 역시 뚜렷하다. 일부 국가는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규제 완화를 지지하는 반면, 다른 국가들은 기존의 강력한 개인정보 보호 체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로 인해 정책 합의 과정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더 나아가 이번 논쟁은 글로벌 기술 질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EU가 규제 완화로 방향을 틀 경우, 그동안 유지돼 온 ‘유럽식 규제 모델’의 국제적 영향력은 약화될 수 있다. 반대로 기존 기조를 유지할 경우, 기술 경쟁에서의 격차가 더 벌어질 위험이 존재한다.
결국 EU는 지금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혁신을 위해 규제를 완화할 것인지, 아니면 시민 권리 보호를 최우선 가치로 유지할 것인지에 따라 향후 유럽의 경제 구조와 사회 모델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정책 논의가 단순한 규제 조정이 아니라 유럽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결정짓는 분기점으로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 선택은 유럽 내부를 넘어 글로벌 AI 경쟁 구도와 디지털 질서 전반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