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 공개된 EU 산업 가속법.. 재생에너지 시장 뒤흔든다

에너지 전환이냐 산업 보호냐.. 시험대 오른 에너지 시장
중국 일강 체제 균열 기대 속 기회와 위험 떠안은 한국 기엄들

 

[엔트로피타임즈 김성민 기자] 유럽연합(EU)이 청정기술과 전략 제조업을 동시에 강화하기 위해 추진 중인 ‘산업가속법(Industrial Accelerator Act)’을 둘러싼 논쟁이 한층 강화될 전망이다. 청정에너지 기술을 포함해 배터리, 전력 장비 등 유럽의 핵심 제조 산업 전반을 지원하고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한 포괄적 정책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 법이 본격적으로 가동될 경우, 이로 인한 관련 산업 지형도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초안이 공개된 직후 터져나온 각종 반발이 서막을 장식한 가운데, 재생에너지 업계 역시 이의 진행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양새다. 재생에너지 업계에서는 에너지 전환 속도를 높이려는 정책 목표에는 업계가 공감하지만 지나치게 보호주의적으로 설계될 경우 오히려 시장 확대를 늦출 수 있다는 우려가 공존하는 것.

 

무엇보다 이번 논의가 단순히 유럽 내부 문제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한국 기업의 전략에도 직결되는 파장을 낳고 있다는 것이 사태의 확장을 점치게 하는 요소다. 한국 역시 법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양반되고 있다. 특히 배터리 분야에서 유럽 내 생산 거점을 확대해온 한국 기업들은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맞닥뜨리고 있다.

 

◆ 태양광 절대강자 중국 독식 저지에 사활 걸어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4일 산업가속화법 초안을 공개했다. 이 법안은 태양광·풍력·배터리·히트펌프 등 청정기술 제조업뿐 아니라 자동차, 철강 등 에너지집약 산업까지 포괄한다. 주요 내용은 △Made-in-EU 조달 규정 △청정에너지 프로젝트 인허가 절차 단축 △외국인 투자 규제 △공급망 강화 등이다.

 

이를 통해 유럽 내 제조 기반을 확대해 에너지 전환과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달성하겠다는 것이 EU의 복안이지만 막상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극히 가변적이라는 것이 시장의 반응이다.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곳이 재생에너지 산업계다.

 

초안이 공개된 4일,해외 에너지 전문매체 <Renewables Now>는 재생에너지 산업 단체들이 해당 법안의 방향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일부 조항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업계가 우려하는 부분은 정책이 지나치게 보호주의적으로 설계될 경우 오히려 에너지 전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것.

 

이런 우려속에서도 법안 통과는 유력해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EU가 처한 상황이 그만큼 만만찮은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EU가 산업 가속법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최근 급격히 변화한 글로벌 에너지 산업 환경이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태양광과 배터리 산업에서 중국 기업들의 지배력이 크게 확대된 것이 중요한 요인이다.

 

현재 태양광 공급망의 대부분은 중국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폴리실리콘부터 웨이퍼, 셀, 모듈에 이르는 주요 단계에서 중국의 점유율은 70~90%에 달한다. 중국의 대형 제조사들은 대규모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가격을 빠르게 낮춰 왔고, 그 결과 지난 15년 동안 태양광 모듈 가격은 약 90% 이상 하락했다. 이러한 가격 하락은 전 세계적으로 태양광 발전 확대를 가능하게 만든 핵심 요인이었지만 동시에 유럽과 미국의 제조 기반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또 다른 변수는 미국의 산업 정책이다. 미국은 2022년 ‘Inflation Reduction Act(IRA)’를 통해 청정에너지 제조 기업에 대규모 보조금을 제공하면서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를 끌어들이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 기업들까지 미국으로 생산 거점을 옮길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EU 내부에서는 산업 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공급망이 지정학적 위험 요소로 떠오르면서 에너지 전환과 산업 자립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논의되는 산업 가속법은 유럽 내 청정기술 제조를 확대하고 공급망을 강화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한다.

 

법안에는 청정에너지 프로젝트의 인허가 절차를 단축하고 전략 산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는 내용이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공공 조달이나 일부 프로젝트에서 유럽산 기술을 우대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다만 재생에너지 업계는 이러한 정책이 시장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히 태양광 분야에서는 가격 경쟁력이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특정 지역 제품을 과도하게 우대할 경우 프로젝트 비용이 상승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단기간 내 시장 구도 변화는 어려워, 새 기회 조성 기류도
현재 글로벌 태양광 시장에서는 중국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이 압도적인 수준이다. 대규모 생산 능력과 공급망 통합을 바탕으로 형성된 낮은 가격 구조 때문에 유럽 제조사들이 단기간에 경쟁력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이로 인해 타 경쟁국과의 갈등이 빈번해졌던 것.

 

물론 EU와 중국 사이의 태양광 무역 갈등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2012년 유럽은 중국 기업들이 덤핑 판매를 하고 있다며 반덤핑 관세와 최소 가격 규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태양광 설치 비용 상승과 시장 성장 둔화라는 부작용을 낳았고, 결국 2018년 대부분의 규제가 종료됐다. 이 경험 때문에 현재 EU 정책 당국은 산업 보호와 시장 확대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데 신중한 접근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유럽이 직면한 문제는 ‘에너지 전환과 산업 보호’라는 두 목표 사이의 균형이다. 산업 보호 정책이 강화되면 태양광 설비 가격이 상승할 수 있고, 이는 재생에너지 확대 속도를 늦추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시장 논리에만 맡길 경우 유럽 내 제조 기반이 더욱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고민은 최근 글로벌 청정에너지 공급망이 지역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과도 맞물려 있다. 미국은 IRA를 통해 자국 제조 기반을 강화하고 있고, EU 역시 공급망을 유럽 내부로 끌어오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대규모 생산 능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공급을 주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청정에너지 산업이 미국, 유럽,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정책 블록’ 형태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 기업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배터리 분야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이미 유럽에 생산 거점을 구축하고 있어 중국 의존도를 줄이려는 정책 환경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배터리 소재와 제조 장비, 전력 장비 등 공급망 상류 분야에서도 한국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고 있어 유럽의 제조 확대 과정에서 수요가 늘어날 가능성이 제기된다.

 

다만 태양광 분야에서는 중국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이 여전히 압도적이기 때문에 단기간에 시장 구조가 크게 바뀌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에 따라 EU 정책 논의 역시 중국 제품을 완전히 배제하기보다는 핵심 기술과 일부 제조 영역에서 자립도를 높이는 절충적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번 산업 가속법 논의는 단순한 산업 정책을 넘어 글로벌 청정에너지 공급망의 미래 구조를 가늠할 중요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