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에 밀린 유럽, AI 인프라에 20조 베팅 승부수

뒤처진 유럽의 반격, 기가팩토리로 판 뒤집기 시도

 

[엔트로피타임즈 손영남 기자] 인공지능 산업에서 독주하는 미·중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좌절에 빠져있던 유럽이 야심찬 도전장을 내밀었다. 유럽연합(EU)은 그간 인공지능(AI) 경쟁에서 뒤처진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약 200억 유로(약 20조 원)를 투입하는 초대형 인프라 구축 계획을 공식화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미국과 중국 중심으로 재편된 글로벌 AI 패권 구도 속에서 유럽이 독자적인 기술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평가된다. 의도는 이해가 가지만 그에 대한 우려 역시 존재한다. 현행 산업 생태계와 자원 확보 측면에서 실효성을 둘러싼 논쟁이 그것. 그러나 이런 논쟁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인공지능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유럽의 행보는 가열차게 이어질 전망이다.

 

◆ 서너 발걸음 뒤처진 유럽의 반격.. ‘AI 생산 인프라’ 구축
영국 일간지 ‘The Guardian’은 지난 9일(현지시간), EU 집행위원회가 ‘AI 기가팩토리’ 구축을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AI 산업 전략을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번 계획은 ‘AI 컨티넌트 액션 플랜(AI Continent Action Plan)’의 일환으로, 유럽을 독자적인 AI 생산 거점으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화 20조원에 달하는 거대자본 투자를 천명할 만큼 EU의 전략은 기존의 시도에 비해 한층 진일보했다는 평가다. 그도 그럴 것이 EU는 그동안 인공지능 분야에서 규제와 윤리 기준을 선도해 왔지만 산업 경쟁력 측면에서는 미국과 중국에 비해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획기적인 전략을 제시하지 않아 일각에서는 기존의 구도를 뒤집을 의욕이 없는 것은 아닌지 의심을 받아오기도 했다. 그런 의심을 한번에 날려버린 것이 이번 프로젝트다. 무엇보다 이번 프로젝트는 기존의 규제 중심 접근에서 벗어, 대규모 투자와 인프라 구축을 중심으로 전략을 전환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The Guardian’은 보도를 통해 “AI 글로벌 경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유럽이 자체 기술 역량을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 시점”이라고 강조한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인 헤나 비르쿠넨의 발언을 전하기도 했다. 이 발언은 유럽이 더 이상 규제 설계자에 머무르지 않고 기술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헤나 비르쿠넨 부위원장이 자신을 드러낸 이유는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인 ‘AI 기가팩토리’의 실상을 살펴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단순한 데이터센터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지닌 AI 기가팩토리는 대규모 연산 자원을 한데 모아 고성능 AI 모델을 개발·생산하는 초대형 디지털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AI 공장’이라 표현할 만큼 그 확정성이 기존의 데이터 센터와 궤를 달리하는 수준이다. 보도에 따르면 EU는 유럽 전역에 최대 5개의 기가팩토리를 구축하고, 각 시설에 10만 개 이상의 AI 반도체를 탑재할 예정이다. 이에 소요되는 총 투자 규모는 약 200억 유로에 달하는데 EU는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선다는 복안이다.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들 시설은 의료, 신약 개발, 기후 분석, 로봇 공학 등 고성능 연산이 요구되는 분야에서 활용될 것으로 보이는데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AI 시대의 철강 공장과 같은 기반 시설”이라고 평가할 정도다. 단순한 기술 활용을 넘어 AI를 ‘생산’하는 능력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시도라는 것이 이채롭다.

 

이 같은 투자 배경에는 유럽의 뚜렷한 기술 격차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 연구진의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주요 AI 모델 수는 미국 40개, 중국 15개, 유럽 3개로 집계됐다. 특히 생성형 AI와 대형 언어모델 분야에서는 미국 기업들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며, 중국 역시 국가 주도의 대규모 투자로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반면 유럽은 규제와 윤리에 집중하는 사이 산업 경쟁력 확보에서는 상대적으로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디지털 주권’ 확보 vs 현실적 제약..성공 여부는 미지수
인공지능은 이제 단순한 산업의 차원을 넘어 한 국가의 주권 개념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EU가 이번 프로젝트에서 ‘디지털 주권(Digital Sovereignty)’을 언급하는 배경이 바로 이것이다. 미국에 기대던 인공지능 산업의 자주화를 통해 EU의 주권을 되찾는다는 것.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 유럽은 클라우드 인프라, AI 모델, 데이터 처리 기술 등 핵심 영역에서 미국 기업 의존도가 높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기술 주도권뿐 아니라 데이터 통제권까지 외부에 의존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기가팩토리 구축은 이러한 의존 구조를 탈피하기 위한 시도로 EU는 자체 인프라를 기반으로 AI 개발과 운영 역량을 확보함으로써 기술과 데이터의 자립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이는 단순한 산업 정책을 넘어 디지털 시대 주권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접근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마냥 장밋빛 전망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먼저 꼽히는 것이 대규모 투자에 따른 현실적 제약이다. 그중에서도 시급히 해결해야하는 부분이 에너지 문제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소비하는 소위 ‘전기 먹는 하마’다. 기존의 공급 체계로 이 정도 전력 공급이 가능하겠냐는 의구심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데이터센터가 전체 전력 수요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는 만큼 이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이번 프로젝트는 전시성 사례로 전락할 위험도 적지 않다.

 

냉각을 위한 물 사용 문제도 묘수를 찾기 어려운 지점이다. 대부분의 데이터 센터 사례처럼 이번 프로젝트 역시 탄소 중립 목표와 충돌할 위험이 크다. 프로젝트 발표와 거의 동시에 환경단체들이 경고하고 나선 배경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규제 문제 역시 중요한 변수로 떠오를 확률이 높다. EU는 그동안 강력한 AI 규제를 추진해 왔지만 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해 규제 완화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내부 논쟁이 촉발되고 있는 상황이다. 소비자 단체들은 규제 완화가 안전성과 권리 보호를 약화시킬 수 있다며 반발하고 있어 EU는 경쟁력 강화와 규제 유지라는 상반된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처지다.

 

산업 생태계 측면에서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다분하다. 현재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고성능 AI 반도체 수급 불균형 문제를 처리하지 못한다면 AI 기가팩토리는 공장이 아닌 가내수공업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유럽 내 대형 AI 기업과 플랫폼들은 고질적인 반도체 수급난을 겪고 있는 상태임을 고려해본다면 이번 프로젝트로 얻게 될 인프라 구축이 기대만큼의 경쟁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영국 통신사 ‘Reuters’가 “유럽이 인프라를 구축하더라도 이를 활용할 기업과 시장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투자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고 분석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처리해야할 선결 과제가 한둘이 아닌 상황이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기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현재 EU의 처지다. 미국, 중국을 비롯한 타국에 기대는 현 수준이 지속된다면 EU는 AI 경쟁에서 구조적으로 종속되는 처지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전개에 따른 위험이 뭐가 됐건 현 체제를 뒤집을 시도는 필요하다.

 

이번 EU의 AI 기가팩토리 프로젝트를 두고 단순한 기술 투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이유기도 하다. 디지털 주권의 중요성이 갈수록 증대되는 가운데. 각국은 저마다 이를 획들하려는 노력을 시도하는 상황이다.

 

EU 역시 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이번 전략적 선택의 성공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미국과 중국의 독과점 체제에 균열을 내는 동시에 새로운 AI 축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물론 실패 시 막대한 재정 부담과 정책 리스크를 떠안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도전을 멈출 수 없는 것이 현재의 흐름이다.